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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20131212)

시간의 향기,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pp. 43

정보는 원자화된 시간, 즉 점-시간의 현상이다.
점들 사이에서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 어떤 센세이션도 일어나지 않는 텅 빈 간극. (...) 그리하여 점-시간은 비어 있는 간극을 제거하거나 단축하고자 하는 강박을 낳는다. 간극이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 센세이셔널한 일들이 더 빨리 연달아 일어나게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장면과 장면, 또는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 히스테리적이라고 할 정도로 가속화된다. 이러한 가속화의 힘은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원자화된 시간은 서사적 긴장이 없는 까닭에 사람들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묶어두지 못한다. 그 대신 인간의 지각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 또는 노골적인 것을 공급받는다. 점-시간은 사색적인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pp. 45

점-시간은 향기가 없는 시간이다. 시간은 지속성을 지닐 때, 서사적 긴장이나 심층적 긴장을 획득할 때, 깊이와 넓이를, 즉 공간을 확보할 때 향기를 내기 시작한다. 시간에서 모든 의미 구조와 심층 구조가 떨어져 나간다면, 시간이 원자화된다면, 평면화되고 희석되고 단축되어버린다면, 시간의 향기도 사라지고 만다. (...) 시간은 내달려간다. 황급하게 마구 달려간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적 결핍을 만회하기 위해서지만, 그런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가속화만으로는 받침대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속화는 오히려 기존의 존재 결핍의 상태를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킬 따름이다.

pp. 52

전반적인 탈시간화는 의미를 형성하던 시간적 매듭, 종결, 문턱, 이행 등의 소멸을 가져온다. 시간이 예전보다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도 뚜렷한 시간의 분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사건이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즉 경험이 되지 못한 채 빠르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버리는 까닭에 더욱 더 강화된다. 중력의 부재로 인해 사물들은 슬쩍 스쳐지나갈 뿐이다. 아무것도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 아무것도 결정적이지 않다. 아무것도 최종적이지 않다. 어떤 결정적 단락도 생겨나지 않는다. 더 이상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이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등가의 연결 가능성들의 차고 넘치기 때문에, 즉 더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어떤 일이 완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완결은 구조화된 유기적 시간을 전제한다. 반면 무한의 열린 과정 속에서는 그 무엇도 완결되지 못한다. 미완성이 항상적 상태가 된다.

pp. 62

오늘의 삶은 받침대가 없는 까닭에 쉽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시간의 분산은 삶의 균형을 깨트린다. 삶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개인의 시간 살림살이에서 짐을 덜어줄 안정적인 사회적 리듬과 박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더 다양화되는 경향이 개개인을 과도한 부담으로 짓누르고 과민 상태로 몰아간다. 따라야 할 시간 규정이 사라진 결과, 자유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 상실 상태가 초래된다.

pp. 64

끊임없이 새로 출발해야 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옵션, 새로운 버전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삶이 빨라졌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지속성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느낌일 뿐이다. (...) 시간이 과거보다 훨씬 빨리 간다는 인상 또한 오늘날 사람들이 머무를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 지속의 경험이 대단히 희귀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정에서 비롯된다. 쫓긴다는 느낌이 놓쳐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는 것도 잘못된 가정이다. "(가치 있는) 뭔가를 놓쳐버릴 수 있다는 불안과 그런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의 속도를 더 높여보고자 하는 소망은 근대에 발달해온 문화 프로그램의 결과이다. 이 문화 프로그램의 핵심은 세계의 가능성들은 더 빠르게 맛봄으로써 다시 말해 체험 속도의 증대를 통해 각자의 삶을 더 충만하게 만들고 더 풍부한 체험으로 채워가는 것, 바로 그렇게 해서 '좋은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속에 가속화가 약속하는 문화적 희망이 담겨 있다. 그 결과 주체들은 더욱더 빨리 살려고 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은 이와 정 반대다. 더 빨리 살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결국 죽기도 더 빨리 죽고 만다.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의 수가 아니라 지속성의 경험이다.

pp. 100

좋은 시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을 비워낸 정신이다. 바로 이러한 비움이 정신을 욕망에서 해방하고 시간에 깊이를 준다. 시간의 깊이는 모든 순간을 온 존재와, 그 향기로운 영원성과 결합한다. 시간을 극도로 무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내달리는 것이다. 정신이 가만히 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pp. 76

하이데거는 의심스럽게도 가속화에 의한 "일상 세계의 파괴"의 원인을 현존재의 본성에 내재하는 "가까움을 향한 경향"에서 찾는다. "현존재는 본성상 거리를 제거하려 한다. (...) 현존재 속에는 본성적으로 가까움을 향항 경향이 있다. (...) 예컨대 '라디오'와 함께 오늘의 현존재는 일상적 환경의 확장과 파괴를 통해 현존재의 감각으로는 아직 조감할 수 없는 '세계'의 탈거리화를 수행하고 잇다." (...) 공간 자체의 완전한 제거는 현존재에게 공간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탈-거리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는 공간 자체를 철폐한다. 하이퍼링크는 길을 없애버린다. 전자우편은 산과 대양을 정복할 필요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전자우편은 더 이상 '수중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수정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눈으로 달려든다. 뉴미디어의 시대는 내파의 시대다. 공간은 시간과 내파되어 여기와 지금이 된다. 모든 것이 탈거리화된다. 탈거리화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공간, 비워져 있다는 것을 본질로 하는 그런 공간은 더 이상 없다.

중요한 부분이 하나 지나간 것 같다. 너무 쉽게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부담감이 개인을 짓누르게 되는가보다. 여러가지를 하게 되면 삶이 풍요로와질 것만 같지만, 그러한 여러가지를 건들기만 할 뿐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너무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이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이 책은 올바른 해답을 제시할 것인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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