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일기

시간의 향기 (20131225)

시간의 향기,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pp. 119

결국 가속화는 불안정하다는 것, 정주할 것이 없다는 것, 받침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가속화된 장면들과 사건들의 연속이 오늘날 세계의 걸음걸이라면, 이는 곧 받침대의 부재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생활세계의 전반적인 가속화는 단지 증상일 뿐이고, 그 원인은 더 깊은 층위에 놓여 있다. 느리게 살기나 긴장 이완의 기법은 거칠게 쏟아져가는 시간을 막을 수 없다. 그런 기법이 문제의 원인을 제거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p. 129

사건이 없는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깊은 권태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다름 아닌 역사와 혁명의 시대,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지속성과 반복의 상태에서 이탈한 이 시대야말로 권태에 취약한 것이다. 아주 약간의 반복조차 이제는 단조로운 것으로 느껴진다. 권태는 결연한 행동의 대립자가 아니다. 오히려 양자는 서로에 대한 조건을 이룬다. 바로 적극적 행동에 나서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권태를 깊게 만든다. (...) 반드시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변화가 풍부해야 충만한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충만한 시간이란 곧 지속의 시간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는 반복도 굳이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속성이 붕괴된 후에야 반복은 반복으로서 의식되고 문젯거리로 떠오른다.

pp. 134

시간은 지속성을, 장구함을, 느림을 잃어버린다. 시간이 주의를 지속적으로 묶어두지 못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것, 자극적인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텅 빈 간격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권태는 필연적으로 "놀라운 것, 거듭하여 갑자기 새롭게 휘몰아 치는 것. '충격적인 것'을 향한 중독"을 수반한다. 충만한 지속성은 "한시도 쉴 줄 모르고 계속되는 기발한 활동"에 밀려난다.

pp. 140

노동은 꼭 해결되어야 할 삶의 욕구에 묶여 잇다. 노동은 자기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필수적인, 궁지를 뒤집는 생활수단인 것이다. (...) 노동은 그에게서 자유를 박탈한다. (...)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비로소 노동에 삶의 필요성을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다. 노동은 이제 신학적 의미 맥락 속에 편입되어 정당화되고 그 가치가 격상되기에 이른다. 루터는 직업으로서의 일을 인간을 향한 신의 부름과 연결시킨다. 캘빈주의에 의해 노동은 구원경제학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캘빈주의자는 자신이 구원받을지 또는 버려질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오직 자기밖에 의지할 데 없는 개인으로서, 행동에 있어 끊임없는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오직 일에서의 성공만이 신에게 선택받은 징표로 해석된다.

pp. 149

소비사회, 여가사회는 특수한 시간적 양상을 나타낸다. 대대적인 생산성의 증가 덕택에 남아돌아가게 된 시간은 즉흥적이고 남는 것 없는 휘발성 사건과 체험으로 채워지고 있다. 시간을 지속적으로 묶어주는 것이 없는 까닭에 시간이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 신상, 모든 것이 가속화되는 인상이 생겨난다. 소비와 지속성은 상반적이다. 소비는 지속을 알지 못한다. 소비재는 파괴를 구성적 요소로서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사물의 등장과 파괴의 주기는 점점 짧아진다.

약간 의미가 제대로 다가오지 않았던 부분이 인용 부분을 쓰며 잘 정리가 되었다. 이제 느리지 못하게 된 시간에서 우리는 자꾸만 자극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종교가 받침대로 존재하던 시대와는 다르다. 우리들은 무엇을 받침대로 삼아야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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