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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20150916)


심리정치,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투명사회를 잇는 그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심리정치란 위정자들이 말하는 그 정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지배하는 정치로 받아들여야 한다. 심리 정치는 자기 착취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끊없는 자본의 챗바퀴를 돌게 만들게 한다. 기분의 소비와 빅데이터 또한 심리 정치를 지지하는 도구들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자신이 예속된 존재로서의 서브젝트가 아니라 계속해서 스스로를 기획하고 창조해가는 자유로운 프로젝트라고 믿고 있다. 서브젝트에서 프로젝트로의 이행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한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프로젝트 자체가 강제의 형상, 심지어 더 효과적인 예속화의 형식임이 밝혀진다.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 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자체를 착취하는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시스템이다. 여기서는 기분(Emotion), 놀이, 커뮤니케이션 등 자유의 실천과 표현 형식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착취의 대상이 된다. 사람을 그의 의지에 반하여 착취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타자의 착취는 그다지 많은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 자유의 착취야말로 최상의 수익을 낳는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본에 "자동적인" 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본의 능동적 번식을 추동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기획하는 프로젝트로서 무한한 자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날은 모두가 자본의 독재 속에서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로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의 특별한 영리함이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만든다. (...)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적 질서 속에서 사람들의 공격성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이러한 자기 공격성으로 인해 피착취자는 혁명가가 아니라 우울증 환자가 된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서 일한다. 자본에서 생성되는 자본의 고유한 욕구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라고 착각한다. 자본은 새로운 초월성, 새로운 예속의 형식이다. 우리는 삶이 어떤 외적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오직 삶 자체로 머물러 있는 차원, 즉 삶의 내재성에서 다시 추방당한다.

우리는 정말로 자유롭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신을 발명하지 않았던가?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빚을 진 존재다. 그런데 빚은 자유를 파괴한다. (...) 어쩌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아도 되려고, 즉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영원이 채무자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 자본은 우리를 다시 채무자로 만드는 새로운 신이 아닐까?

사람들은 내면이 없는 존재로 바뀌어간다. 내면은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느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탈내면화는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노출을 통해 일어난다. 부정성으로서의 이질성과 낯섦은 탈내면화되어 소통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차이나 다양성과 같은 긍정적 특징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오늘날 디지털 심리정치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수동적 감시의 단계에서 능동적 조종의 단계로 전진하는 중이며, 이로써 우리를 더 깊은 자유의 위기 속으로 빠트린다. 자유 의지 자체가 위기에 빠진다. 빅데이터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동력학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획득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심리정치적 도구다. 이러한 지식은 지배를 위한 지식으로서, 이를 통해 개인의 심리 속에 파고들어 반성 이전의 층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간 자체가 긍정화되어 양화하고 측정하고 조종할 수 있는 사물이 된다. 사물은 자유롭지 않지만, 어쨌든 인간보다 더 투명하다. 빅데이터는 인간의 종언, 자유 의지의 종언을 선포한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은 섬세하고 유연하며 스마트한 형태를 취하며, 결국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예속된 주제는 자신의 예속되어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예속된 주체에게 지배 관계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스마트 권력은 심리를 훈육하거나 강제와 금지의 굴레에 묶어두지 않고, 오히려 심리에 착 감겨온다. 그것은 우리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다. (...) 오늘날 자유의 위기는 자유를 부정하고 억압하기보다 자유를 착취하는 권력을 상대해야 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자유로운 결정은 미리 정해져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선택으로 전락한다.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최적화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권력이 제압해야 할 저항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배는 큰 힘을 소모할 필요도 없고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지배는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다. 스마트 권력은 호감을 사고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지배하려고 한다. 다음과 같은 경고 문구는 좋아요-자본주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심리정치가 이 체제의 통치 형식이 된다.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경쟁을 끊임 없이 확산시킨다." 이로써 "유익한 승부욕과 탁월한 행휘 동기"가 촉발된다는 것이다. 모티베이션, 프로젝트, 경쟁, 최적화, 자발성은 모두 신자유주의 체제의 심리정치적 통치술에 속한다. 뱀은 무엇보다도 죄, 즉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배 수단으로 사용하는 채무를 상징한다.

규율 권력은 죽음의 권력이 아니라 삶의 권력이다. 그것의 기능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완벽한 관철에 있다. 오랫동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해온 죽음의 위협은 "몸의 세심한 관리"와 "계산적인 계획"으로 대체된다.

규율 권력은 표준화하는 권력이다. 그것은 주체를 규범, 명령, 금지의 체계에 예속시키고, 일탈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바로 이러한 조련의 부정적 성격이 규율 권력의 본질적 요소다. 그 점에서 규율 권력은 군주의 권력과 인접 관계에 있다. 군주 권력도 부정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군주 권력의 부정성은 솎아내는 부정성이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시각 매체의 의존한다. 파놉티콘은 내면의 생각이다 욕구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 점에서 통계는 빅데이터와 구별된다. 빅데이터는 개인의 심리 지도뿐만 아니라 집단적 심리 지도, 더 나아가 무의식의 심리 지도까지도 작성할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심리를 무의식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훤히 비추고 착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심리에서 생산력을 발견한다. 이러한 심리와 심리정치로의 전환은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 형식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비물질적이고 비육체적인 생산 형식이다. (...)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신체적 저항의 극복이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 과정의 최적화가 요구된다.

개인이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통해 지배 관계를 자신의 내면에 전사하도록 유도한다. 개개인은 이렇게 내면에 전사된 지배 관계를 자유로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의 최적화와 복종,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라는 형식으로 자유와 착취를 결합시키는 이러한 권력 기술은 푸코의 시야 너머에 있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점점 더 세련된 자기 착취의 형식을 고안해낸다. 수많은 자기 관리 워크숍, 모티베이션 주말 워크숍, 인성 세미나, 멘탈 트레이닝 등이 끝없는 자아 최적화와 효율성 향상을 약속한다. 이러한 행사들은 우리의 노동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 전체, 우리의 모든 관심, 우리의 삶 자체를 착취하려고 노리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에 조종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인간을 발견하고 그 자체를 착취 대상으로 삼는다.

자아최적화하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은 시스템 내에서 완벽하게 기능하라는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효율성과 성과의 제고를 위해 심리적 억압, 약점, 실수 같은 것은 치료를 통해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비교 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것으로 환원되고 시장의 논리에 종속된다. 자아의 최적화를 추동하는 것은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자아 최적화의 필요성은 시스템의 강제 즉 양화 가능한 성공을 요구하는 시장논리에서 유래한다.

미국의 자기계발서에서 통용되는 마법의 주문은 힐링이다. 힐링이란 효율과 성과의 이름으로 모든 기능적 약점, 모든 정싱적 억압을 치료를 통해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자아의 최적화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인격을 긍정성의 강제 속에 완전히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죽은 존재"로 쭈그러들 것이다. 부정성은 삶을 생동하게 한다. 고통은 경험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삶이 순전히 긍정적 감정과 플로우(몰입) 경험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텔레스크린과 고문실을 통해 작동하는 오웰의 감시국가는 무제한적 자유와 커뮤니케이션의 가상이 지배하는 인터넷, 스마트폰, 구글글래스의 디지털 파놉티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디지털 파놉티콘에서 사람들은 고문받는 것이 아니라 트윗하고 포스팅한다. "진리부"같은 비밀스러운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투명성과 정보가 진리를 대체한다.

기분은 역동적이고 상황적이며 수행적이다. 감성 자본주의는 바로 기분의 이러한 속성을 착취한다. 반면 감정은 수행성이 결여된 까닭에 좋은 착취의 대상이 못 된다. 흥분도 수행적이지는 않다. 흥분은 분출적이다. 흥분에는 수행적 방향성이 결여되어 있다.

흥분은 지속적 상태가 아니다. 흥분에는 감정을 특징짓은 항상성이 없다. 항상적인 불안 감정이야말로 쉼 없는 기업 활동의 원인이다. 그리고 베버가 분석하는 자본주의는 금욕적 축적의 자본주의로서 감성보다는 이성의 논리를 따른다. 따라서 이는 기분을 자본으로 삼는 소리자본주의로 연결될 수 없다. 세다가 소비자본주의에서는 의미와 기분이 판매되고 소비된다. 사용가치가 아니라 감성적, 제의적 가치가 소비의 경제에서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규율사회의 매체인 합리성은 생산 수준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한계에 봉착한다. 이제 합리성은 강제와 장애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합리성은 하루아침에 융통성 없는 경직된 매체가 된다. 합리성은 감성으로 대체된다. 감성은 자유의 감정, 개성의 자유로운 발산을 동반한다.

감성 디자인은 기분을 모델링한다. 즉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 표본적으로 기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결국 사물이 아니라 기분을 소비한다. 기분은 사용가치의 피안에서 전개되어간다. 이로써 새로운 소비의 장이 무한히 펼쳐진다.

감성 자본주의는 생산성의 증진을 위해 본래는 노동의 타자라고 할 수 있는 놀이의 영역마저 점령한다. 감성 자본주의는 삶의 세계와 노동의 세계를 게임화한다. 게임은 노동을 감성화하고 극화하며, 이로써 더 많은 모티베이션을 생성한다. (...) 신속한 보상 시스템은 더 많은 성과와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기분이 들떠 있는 게임 플레이어는 합리적으로 기능하는 노동자보다 훨씬 열성적으로 작업에 임한다.

센서는 명상시의 심장 박동도 체크한다. 긴장을 이완시키는 휴식의 시간에도 중요한 것은 여전히 성과와 효율인 것이다. 마음의 상태, 감정, 일상적 활동도 일일이 기록된다. 이러한 자기 측정과 자기 통제의 목적은 정신적, 육체적 성능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축적되는 어마어마한 데이터 더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도 해주지 못한다.

양자된 자아의 구호는 "수치(Numbers)를 통한 자기 인식"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가능한 모든 데이터와 수치를 쌓아 올린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자기 인식이 만들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수치는 자아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계산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자아를 지탱하는 것은 이야기이다. 계산이 아니라 이야기가 자기 발견과 자기 인식에 이르게 해준다.

데이터 마이닝은 디지털 돋보기로서 인간의 행동을 확대하여 의식이 작용하는 행동 공간 뒤에서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또 하나의 행동 공간을 조명해준다. 빅데이터의 미시물리학은 액통, 즉 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미시 행동을 가시화할 것이다. 빅데이터는 또한 개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집단적 행동 패턴도 드러낼 것이다. 이로써 집단 무의식에의 접근이 가능해준다.

빅데이터는 절대지의 인상을 준다. 모든 것이 측정되고 양화될 수 있다. 빅데이터를 통해 사물들은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비밀스러운 상관관계를 드러낸다. 인간 행동에 대한 정확한 예측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를 대체한다. 그냥 그럴 뿐이라는 확인이 왜 그런가 하는 질문에 대한 설명을 대체한다.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현실의 양화 과정이 정신을 지식에서 몰아내고 있다.

아무리 강력한 상관관계가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왜 그러한 관계가 성립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냥 그럴 뿐이다. 상관관계는 필연성의 관계가 아니라 개연성의 관계다. A는 빈번히 B와 동시에 발생한다. 이 점에서 상관관계는 인과관계와 구별된다. 인과관계의 근본 특징은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A는 B를 초래한다.

이러한 획일화는 오늘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타자, 낯선 것, 불일치를 제거하는 순응의 압력이 발생한다. 빅데이터는 무엇보다도 집단적 행동패턴을 가시화한다. 다타이즘 자체가 동일화의 증대 경향을 강화한다. (...) 따라서 빅데이터는 유일무이한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오늘날 아웃사이더, 천치, 바보는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전면적인 디지털 네트워크화와 총체적 커뮤니케이션은 순응의 압박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합의의 폭력은 바보짓을 억압한다.

지능은 '-사이에서 고르기'를 의미한다. 지능은 시스템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사이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지능에게 외부로 나가는 출구는 차단되어 있다. 허용되는 것은 오직 시스템 내의 선택뿐이기 때문이다. 즉 지능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없고, 다만 시스템이 제공하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고를 수 있을 따름이다. 지능은 시스템의 논리를 따른다. 지능은 시스템 내재적이다. 시스템은 각자의 방식으로 지능을 규정한다. 지능은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지능은 수평적 차원에 거주한다. 이와 달리 바보는 지배적인 시스템, 즉 지능과 결별하면서 수직적인 것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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