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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20160831)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최근 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오늘날 사랑은 무한한 선택의 자유와 다양한 옵션, 최적화의 강요 속에서 파괴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끝없이 열려 잇는 세계에서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고들 한다.

사랑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타자의 공급이 넘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타자의 침식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와 아울러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정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잇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토포스라고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아토포스적 타자에 대한 경험 자체가 사라져버린 까닭에,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비교하며 이로써 모든 것을 동일자로 평준화한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포티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차이는 타자성과 반대로 일종의 긍정성이다. 오늘날 부정성은 도처에서 소멸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평탄하고 다듬어지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점점 강화되어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리비도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주체성에 투입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 속을 철벅거리며 나아가다가, 결국 그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준다. 이때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긴 채 주체의 에고를 확인해주는 거울로 전락한다. 이러한 인정의 논리는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를 자신의 에고 속에 더 깊이 파묻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성공 우울증이 발생한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 속으로 침몰하고 그 속에서 익사한다. 반면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사랑의 주체는 특별한 약화의 과정 속에 붙들리지만, 이러한 약화에는 강하다는 감정이 수반된다. 물론 이 감정은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이다.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해야 한다')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 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생산성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해야 함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해야함은 할 수 있음으로 대체된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명령하고 착취하는 타자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 낳으며 성과주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성과주체는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라고 여기며, 강제를 강제로 인식하는데 실패한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빚을 탕감받고 속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로써 채무의 위기 뿐만 아니라 보상의 위기까지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죄(채무)를 만들기만 할 뿐이다. 자본주의에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파산이란 말 그대로 채무 상황이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바로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가지다' '알다' '붙잡다'는 모두 할 수 있음의 동의어다."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 전시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다. 타자는 성애화되어 흥분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소비할 뿐이다. 그러한 타자는 성적인 부분 대상들로 파편화되기에 더 이상 하나의 인격성을 지니지도 못한다. 성적 인격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버에 따르면 근원거리는 "인간의 원리"로 기능하며 타자성이 성립될 수 있는 초월적 전제를 이룬다. "근원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으로 전락하고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성적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그러한 타자와는 어떤 관계도 맺어지지 않는다. "근원거리"는 타자를 그의 다름 속으로 놓아주는, 그 속으로 멀어지게 하는 초월적인 예의를 창출한다. 그것은 바로 강한 의미에서 말 건네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성적 대상을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게 말을 건넬 수는 없다. 성적 대상에는 "얼굴"도 없다. 얼굴은 타자성, 즉 거리를 요구하는 타자의 다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예의가, 예의바름이, 바로 이격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즉 타자를 그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경험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에 의지하여 타자를 최대한 가까이 끌어오려고 한다. 그리고 가깝게 만들기 위해 타자와의 거리를 파괴하려 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타자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거리의 파괴는 타자를 가까이 가져오기는 터명 오히려 타자의 실종으로 귀결된다. '가까움'은 그 속에 '멂'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부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먼 것의 완전한 철폐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먼 것의 철폐는 가까움을 만들어내기는커녕, 오히려 가까움의 철폐로 이어진다. 가까움 대신에 거리의 부재 상태가 형성되는 것이다. 가까움은 부정성이기에 속에 긴장을 품고 있다. 반면 거리의 부재는 긍정성이다. 부정적인 것은 그 대립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바로 여기에 부정성의 힘이 있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에는 이처럼 생동하게 하는 힘이 없다.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어 향락의 공식으로 여겨진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안락한 감정을 생성해야 한다. 사랑은 더이상 행위도, 이야기도, 드라마도 아니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기분이요 흥분이다. 이제 사랑은 상처와 급습과 추락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너무 부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이룬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의 주도권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밑도 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할 수 있음이 지배하는 성과사회,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 주도권과 프로젝트가 전부인 사회는 강처와 고뇌로서의 사랑에 접근하지 못한다.

과도하게 반복 사용되는 "감미로운"이라는 형용사는 긍정성의 명령이 모든 것을 향유와 소비의 공식으로 바꾸어버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는 심지어 "감미로운 고문"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러한 긍정성의 세계에서는 소비 가능한 것만이 허용된다. 고통조차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통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헤겔의 부정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미래는 타자의 부정성을 벗어버리고 모든 재앙을 차단한 긍정성, 최적화된 현재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있었던 것의 박물관화는 과거를 파괴한다. 과거는 반복 가능한 현재가 되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부정적 특성을 상실한다. 기억은 있엇던 것을 그대로 다시 눈앞에 떠오르게 해주는 단순한 복원의 기관이 아니다. 있었던 것은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기억은 앞으로 나아가는 살아 있는 서사적 과정이며, 이 점에서 데이터 저장 장치와 구별된다. 데이터 저장 장치와 같은 기술 매체는 있었던 것에서 모든 생명력을 빼앗아간다. 그것은 무시간적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세계는 전면적인 현재의 지배 속에 놓이게 된다. 전면적 현재는 순간을 폐기한다. 순간이 없는 시간은 그저 더해지기만 할 뿐, 더 이상 상황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클릭의 시간으로서, 결정과 결단을 알지 못한다. 순간은 사라지고 클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오늘날 사랑이 점점 더 긍정화되고 길들여짐에 따라 사랑의 부정성도 희귀해져간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오늘날 성과주체는 헤겔의 노예와 유사하다. 다만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주인인 동시에 노예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이야기한 헤겔도 생각하지 못한 치명적인 통일성이다. 자기 착취의 주체는 타자 착취의 주체만큼이나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노예 주인 혹은 주인 노예일 뿐, 결코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역사가 종말에 이를 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역사를 자유의 역사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역사는 우리가 정말 자유로워질 때, 우리가 주인도 노예도 아니고, 주인 노예도, 노예 주인도 아닐 때 비로소 종언을 고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벌거벗은 삶을 절대화한다. 좋은 삶은 자본주의의 목표가 아니다. 축적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 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죽음은 절대적 손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순수한 영리 행위는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삶 자체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 자본과 생산의 운동은 좋은 삶을 목표로 하는 이념을 떨쳐버림으로써 무한한 가속화 과정에 빠진다. 방향을 상실한 운동은 극단적으로 가속화된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노골적이고 파렴치해진다.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원하기에 타자에게서 등을 돌리는 정신은 제한된 정신이다. 절대적인 정신은 이와 반대로 타자의 부정성을 인정한다. "정신의 삶"은 헤겔에 의하면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파멸로부터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가는" 삶이다. 정신이 생동성을 지니는 것은 바로 죽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절대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긍정성"이 아니다. 정신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는다. 정신은 절대적이다. 정신은 극단적인 데까지, 극도의 부정성에 이르기까지 과감하게 들어가 이를 자기 안에 끌어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극단적인 것과 극도의 부정성을 자기 안에 품음으로써 완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절대적 결론으로서의 사랑은 죽음 속을 통과한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 속에서 죽지만 이 죽음에 뒤이어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타자를 폭력적으로 붙들어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헤겔 사유의 중심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우울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결론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떠 내려가버릴 것이다. 우울증의 주체가 안정된 자아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유부단함, 결단력의 결핍이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의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삶을 완결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죽는 법도 잊어버렷다. 성과주체 역시 결론을 맺지 못하고 완결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더 많은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바스러진다.

그러한 삶이란 노예의 삶일 뿐이다. 벌거벗은 삶에 대한 염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삶에서 모든 생동성을 빼앗아간다. 생동성은 대단히 복합적인 현상이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생동성이 없다. 부정적인 것은 생동성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생동성은 벌거벗은 삶의 활력 또는 건강한 체력과 구별된다. 벌거벗은 삶의 활력에는 어떤 부정성도 없다. 생존하는 자는 삶아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는 산송장과 비슷한 존재다.

포르노는 전시의 대상이 된 벌거벗은 삶과 관련된다. 포르노는 에로스의 적수다. 포르노는 성애 자체를 파괴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도덕보다 더 강력하다. "성애는 승화나 억압, 도덕 속에서가 아니라, 분명코 성적인 것보다 더 성적인 것 속에서, 포르노 속에서 사그라질 것이다." 포르노의 매력은 "살아 있는 성애 속에서 죽은 섹스를 예감"하게 한다는 데서 나온다. 포르노가 음란한 것은 과다한 섹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가 없다는 사실이 포르노를 음락하게 만든다.

"모델, 포르노스타, 그 외 모든 프로 전시꾼이 무엇보다도 먼저 습득해야 할 것은 바로 뻔뻔한 무관심이다. 내보이는 것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 (쯕 매체에 절대적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 이렇게 해서 얼굴은 전시가치로 가득 채워져 터질 지경이 된다. 하지만 바로 이처럼 표현이 파괴됨에 따라 에로티즘은 본래 그것이 발생할 수 없는 영역에까지 밀고 들어온다. 즉 인간의 얼굴 속까지."

하지만 비밀도, 표현도 없이 구경거리로 전시된 벌거벗음은 포느로적 노골성에 가까워진다. 포르노적 얼굴 또한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한 얼굴에는 표현성도, 비밀도 없다. "하나의 형식에서 다음 형식으로 나아감에 따라, 그러니까 유혹에서 사랑으로, 욕망에서 성애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저 단순한 포르노로 전진해감에 따라, 그만큼 더 강력하게 비밀과 수수께끼는 위축된다. (...) " 에로틱한 것에는 언제나 비밀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전시가치로 터질 지경이 된 얼굴에서 "성애의 새로운, 집단적 사용법"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감벤의 기대와는 반대로 전시는 모든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비밀도, 표현도 없는 얼굴, 오직 전시성만으로 환원되어버린 맨얼굴은 음란하고 포르노적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성애의 다른 용법을 알지 못한다. 에로스는 프로노로 비속화된다.

그저 따듯함, 친밀함, 안락한 자극을 넘어서지 않는 오늘의 사랑은 신성한 에로티즘이 파괴되었음을 암시한다. 포르노에서 완벽하게 배제되는 에로틱한 유혹 역시 환상의 연출, 가상 형식과의 유희를 필요로 한다.

일루느는 선택의 자유가 증가함에 따라 욕망의 "합리화"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한다. 욕망은 더 이상 무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적 선택을 통해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욕망의 주체는 "철저하게 선택을 통한 결정에 주의를 집중하고, 타인에 관하여 무엇이 이성적인 관점에서 소망할 만한 기준인지 숙고하며, 이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받는다. 더 나아가 상상이 고조됨에 따라 "남성과 여성이 파트너에 대해 가지는 바람도, 함께하는 삶의 전망에 대한 요구도 변화했고 상향 조정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사람들은 "환멸"도 더 자주 경험한다.

소비문화는 욕망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오늘날 소비문화는 우리에게 욕망과 상상력을 이용하고 백일몽 속에 빠져들라고 다그친다.

인터넷 역시 "근대적 주체를 욕망의 주체로, 즉 경험을 동경하고 어떤 대상이나 삶의 형태에 대하여 백일몽에 빠지며, 상상적, 가상적 방식으로 경험을 맛보는 주체로" 자리잡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근대적 자아는 자신의 소망과 감정을 점점 더 상상적인 방식으로, 즉 상품과 매체 이미지를 통해서 지각한다. 그의 상상력은 무엇보다도 소비재 시장과 대중문화에 의해 규정된다.

오늘날 욕망이 선택 결정권과 기준의 증가를 통해 "합리화"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무한정한 선택의 자유는 오히려 욕망의 종말을 재촉한다. 욕망이란 언제나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결여의 부정성이 욕망을 자라게 한다. 욕망의 대상인 타자는 선택의 긍정성 속에 붙잡히지 않는다. "파트너 선택의 기준을 분명히 표현하고 정교화하는 무진장한 능력"을 갖춘 자아는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다.

정보로 충만한 고선명 영상은 아무것도 불확정적인 상태로 놓아두지 않는다. 하지만 환상은 불확정적 공간 속에 거주한다. 정보와 환상은 서로에 대해 대립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타자를 "이상화"할 능력이 없는 "조밀한 정보"로 이루어진 상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의 구성은 정보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결여의 부정성을 통해 비로소 아토포스적인 이질성을 지닌 타자가 생성된다. 부정성은 타자를 "이상화"와 "과대평가"너머에 있는 더욱 고차원적인 존재의 평면으로 데려간다. 정보는 그 자체가 타자의 부정성을 해체하는 긍정성이다.

오늘의 사회에서 환멸이 커지고 있다면, 이는 환상의 고조가 아니라 기대의 상승 때문일 것이다. 일루즈가 제시하는 환멸의 사회학의 문제점은 환상과 기대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환상에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과도한 가시성은 상상력에 유익한 것이 못 된다. 그리하여 시각정 정보를 최대화하는 포르노는 에로틱한 환상을 파괴한다.

바르트는 카프카의 다음 문장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사물에서 의미를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 감기다." 오늘날에는 과도하게 가시적인 이미지들의 어마어마한 더미가 눈 감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미지들의 빠른 교체도 눈 감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을 감는 것은 일종의 부정성으로서 오늘날처럼 긍정성과 과도한 가시성이 지배하는 가속화 사회와는 양립할 수 없다. 기민성에 대한 과도한 강박은 눈 감기를 어렵게 한다. 이러한 강박은 성과주체의 신경소진을 초래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사색적인 머무름은 결론의 형식이다. 눈을 감는 것은 바로 결론의 표지다. 지각은 오직 사색적인 안식 속에서만 종결을 이룰 수 있다.

과잉 가시성은 문턱과 경계의 해체 과정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투명사회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다. 평탄하게 다듬어진 공간은 투명하다. 문턱과 다리는 아토포스적 타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비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지대다. 경계와 문턱이 사라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문턱의 부정성이, 문턱의 경험이 없는 곳에서는 환상도 위축된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세워지는 국경의 철조망이나 장벽은 더 이상 환상을 자극하지 못한다. 철조망과 장벽은 타자를 발생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경제적 법칙만이 지배하는 동일자의 지옥을 관통한다. 그리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가 분리된다. 이 새로운 경계를 낳는 것은 자본이다. 하지만 돈은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직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계는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그것은 어딘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문턱이나 다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을 조종한다.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 용기, 이성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충동이 영혼의 쾌락 경험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따라 용기를 동력으로 하는 행동은 드물어진다. 용기와 관련된 것으로는 이를테면 기존의 질서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축발하는 분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분노는 사라지고 짜증과 불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짜증과 불평에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다. 또한 에로스 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한다. 계산으로서의 이성은 사건,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에로스의 자극에 의해 용기는 아름다운 업적을 이룰 수 있다. 아마도 에로스와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용기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의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사랑은 "둘의 무대"다.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또는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근원적 전복의 부정성은 경험과 만남으로서의 사랑이 지니는 특징에 속한다.

성적 주체는 늘 동일하다. 그에게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 가능한 성적 대상은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 대상은 결코 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성애는 동일자를 재생산하는 습관적인 것의 질서에 속해 있다. 그것은 한 개별자의 다른 개별자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에서는 "둘의 무대"에서 상연되는 이질적인 것의 부정성을 찾아볼 수 없다. 포르노그래피는 이질성을 완벽하게 소거함으로써 습관화의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포르노그래피의 소비자에게는 성애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개별자의 무대 위에 거주한다. 포르노적 이미지에서는 어떤 타자의 저항도, 어떤 실재의 저항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예의도, 어떤 거리도 없다. 포르노적이라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접촉, 타자와의 만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낯선 것의 접촉과 감정적 격동에서 지켜주는 자기성애적인 자기 접촉, 자기 애착은 포르노적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강화한다.

얼마전 <와어이드>지의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이 "이론의 종말"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이제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활용 가능해짐에 따라 이론적 모델은 완전히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 아니 도대체 모델이라는 것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귀속 및 종속 관계를 바탕으로 거기에서 패턴을 찾아낸다. 가설적인 이론적 모델은 데이터의 직접 비교에 자리를 내준다. 인과 관계는 상관관계로 대체된다. "(...)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사실이고, 우리는 사상 유례없이 정확하게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추적하고 측정할 수 있다."

앤더슨의 테제의 근저에는 허약하고 단순화된 이론 개념이 깔려있다.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가설이나 모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학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데이터와 정보의 더미에 휩쓸려, 이론과 사유에서 아주 멀리 떠나가고 있다. 정보는 그 자체 긍정적이다. 데이터에 바탕을 둔 실증과학, 데이터를 비교하고 평균을 내는 게 전부인 실증과학은 강한 의미에서의 이론에 종언을 고한다. 그러한 과학은 서사적이기보다 가산적이고, 해석학적이기보다 폭로적이다. 여기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적 긴장이 없다. 그리하여 실증과학은 단순한 정보들로 해체된다. 정보와 데이터가 걷잡을 수 없어 불어나는 오늘날 오히려 이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이론은 사물이 서로 뒤섞이고 통제할 수 없이 증식하는 것을 막아주며, 이로써 엔트로피의 감소에 기여한다.

에로스는 사유를 이끌고 유혹하여 전인미답의 지대를, 아토포스적인 타자를 거쳐가게 한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지니느 마력은 아토피아의 부정성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아포리아(해결 불능의 난데)로 귀착되지 않는다. 전승되어온 견해와 달리 플라톤은 포로스가 에로스의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포로스는 길을 의미한다. 사유는 과감하게 전인미답의 지대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에로스는 포로스의 아들답게 사유에게 길을 일러준다.

플라톤은 에로스를 철학자(필로소포스), 즉 지혜의 친구라고 부른다. 철학자는 친구이며, 사랑받고 사랑하는 연인이다. 하지만 이 연인은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개인도 아니고, 어떤 경험적 사태도 아니다. 그것은 "사유 속에 들어있는 어떤 내적 현존, 사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하나의 생동하는 범주, 초월적인 경험"이다. 강한 의미에서의 사유는 에로스가 아니라면 시작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친구, 혹은 연인이었던 사람만이 사유할 수 있다. 에로스 없는 사유는 모든 생명력과 불안정성을 상실한 채, 반복적이고 반작용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에로스는 아토포스적인 타자를 향안 욕망을 불어넣음으로써 사유에 활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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