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일기

페다고지 (20150614)


페다고지,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그린비

누군가의 소개 글을 통해 손이 가게 된 책인데, 읽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특히 그간 직장에서의 문제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단편적인 문제보다 구조의 문제점, 직장 뿐 아니라 사회 구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과 연결되는 나의 독서 경험이라고는 <체 게바라 평전>뿐인 것 같아, 제대로 읽어냈는지는 자신이 없다. 언젠가 생각나고 떠오를 때 다시 찾아볼만한 정도의 기억으로 남는 정도로 충분하다.

책의 무대는 라틴 아메리카의 노동환경을 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책에서 언급하는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구도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나라, 우리 회사에서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선진 기술 사회는 우리 대부분을 급속이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우리를 사회 체계의 논리에 섬세하게 짜맞춰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역시 또 다른 '침묵의 문화' 속에 침잠해 있는 것이다.

덜 인간적인 상태는 완전한 인간성의 왜곡이므로 조만간 피억압자로 하여금 그런 상태를 만든자에 대한 투쟁에 나서도록 만든다. 이 투쟁이 의미를 가지려면, 피억압자는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과정에서 거꾸로 억압자를 억압하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되며, 양측의 인간성을 모두 회복하려 해야 한다. (...) 피억압자의 약함을 존중해 억압자가 자신의 권력을 '완화'하려 하면, 그것은 대개 허구적 관용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그런 시도는 그 이상을 넘지 못한다.

이러한 교훈과 훈련은 피억압자 자신들, 그리고 그들과 참된 연대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개인으로서든, 집단으로서든 그들은 인간성 회복을 위해 싸움으로써 진정한 관용의 회복을 도모하게 된다. (...) 피억압자는 이 해방을 우연히 얻는 것이 아니라 해방을 추구하는 프락시스(praxis, 이론적 실천)로써, 해방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함으로써 쟁취하는 것이다. 또한 피억압자가 설정한 애초의 목적 때문에 이 싸움은 억압자의 폭력 한가운데 있는, 때로는 허구적 관용 속에 감춰진 비정함에 반대하는 사랑의 행위가 된다.

투쟁의 프락시스를 통해 억압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해방을 달성하는 데 심각한 장애물은 억압적 현실이 그 현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흡수하며, 그럼으로써 인간존재로서의 의식을 은폐하는 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억압의 기능은 길들이는데 있다. 억압적 힘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길들여짐을 거부하고 공격해야 한다.

(억압자에게) 돈은 모든 것의 척도이며, 이윤은 주요한 목적이다. 억압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피억압자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가급적 좀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삶이란 곧 소유이며, '가진 자'의 계급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억압자는 억압적 상황의 수혜자이므로, 만약 소유가 존재의 조건이라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베푸는 관용은 허구적이다. 인간성은 '사물'일 뿐이고, 그들은 그것을 배타적 권리로, 상속받은 재산으로 소유하고 있다. 억압자의 의식에 '타인들', 민중의 인간화는 완전한 인간성의 추구가 아니라 전복이 기도로 보인다.
억압자는 더 많은 소유를 독점하려는 자신들의 권리가 실은 타인들과 그 자신들을 비인간화시키는 특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유산계급으로서 고유를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점차 자신들이 그 소유물에 짓눌려 결국은 더 존재할 수 없고, 다만 소유만 남을 뿐이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억압자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과학과 기술을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조작과 억제를 통해 억압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대상이자 '사물'이 된 피억압자는 오로지 억압자가 그들에게 명령한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의도도 가질 수 없다.

이렇게 해서 교육은 예금 행위처럼 된다. 학생은 보관소, 교수는 예탁자다. 양측이 서로 대화하는 게 아니라, 교사가 성명을 발표하고 예탁금을 만들면, 학생을 참을성 있게 그것을 받아 저장하고, 암기하고, 반복한다. 이것이 바로 '은행 저금식' 교육 개념이다. 여기서는 학생들에게 허용된 행위의 범위가 교사에게서 받고, 채우고, 보관하는 정도에 국한된다. (...) 결국 이런 오도된 제도에서는 구나 창조성, 변화, 지식이 결여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탐구 정신과 프락시스가 없으면 진정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지식은 창조와 재창조를 통해서만 생겨나며, 인간은 끊임없고 지속적인 탐구 정신을 통해 세계 속에서 세계와 더불어, 또 타인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은행 저금식 교육에서는) 교수의 임무는 이미 저절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조직화하는 것이며, 교사 자신이 참된 지식이라고 여기는 정보의 저축물을 구성해서 학샙들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민중은 세계를 수동적인 실체로 '수용'하기 때문에 은행 저금식 교육은 그런 민중을 더욱 더 수동적으로, 세계에 적응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교육받은 개인은 세계에 잘 '어울리기' 대문에 적응에 성공한 사람이다. 이 구상을 실천의 영역으로 옮겨다 놓으면 억압자의 목적에 매우 잘 부합된다. 억압자의 삶이 평온하려면 억압자가 창조한 세계에 민중이 잘 적응하고 그것을 문제삼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제기식 교육 방법은 교사-학생의 행동을 이분화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교사가 어떨 때는'인식적'이고, 어떨 때는 '설명적'인 일이 없다. 교사는 학습안을 준비할 때나 학생들과의 대화에 참영할 때나 똑같이 늘 '인식적'이다. 교사는 인식 대상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학생들이 함께 성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배제하는 상황은 폭력적인 상황이다. 거기서 어떠한 수다늘 사용하가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인간존재를 자신의 의사결정에서 소외시키는 것은 모두 인간을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다.

혁명 지도부가 민중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 대화를 통해 민중 자신의 객관적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인식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즉 민중이 자기 자신과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에 관해 다양한 수준의 인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지배자는 지배하기 위해 민중의 진정한 프락시스를 부정한다. 그들에게는 민주잉 자신의 말을 하며 자신의 생각을 하는 권리를 부정하는 것 이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배자는 변증법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그들이 자신의 지배권을 철폐하고 피억압자의 대의에 돚조하거나, 아니면 판단 착오로 자신들의 권력을 잃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혁명적 휴머니즘은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피억압자를 분석 대상으로 취급하고 행동 지침을 내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억압 이데올로기의 신화, 즉 무지의 절대화라는 함정에 빠져버리게 된다. 이 신화는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무지를 강요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렇게 강요하는 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급을, 지식을 가진 자 혹은 지식을 가질 수 없는 자로 규정하며, 또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한다. 그가 속한 계급의 말은 '진리'의 말이 되며,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반면 피억압자의 말은 빼앗기고 사라져버린다.

반대화적 행동의 특징 : 정복, 분할 통치, 조작, 문화 침략

정복 욕구는 반대화적 행동 속에 항상 나타난다. 이를 위해 억압자는 세계를 '고찰'하는 피억압자의 능력을 파괴하고자 한다. 그러나 억압자는 그 파괴를 완전히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를 신화화해야 한만 한다. 피억압자와 피정복자에게 위선의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소외와 수동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억압자는 세계를 문제로서 제시하는 것을 방해하고, 대신 고정된 실체로서, 주어진 것으로서 보여준다. 그리하여 민중은 단순한 구경꾼으로서 세계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억압자의 입장에서는 정복을 통해 민중이 계속 수동적인 상태로 남아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한다든가, 피지배 계습의 '대표'를 선호한다든가, 지도적 역량을 가지고 있어 장차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을 승진시켜 '유화'시킨다든가, 일부에게는 혜택을 주고 나머지에게는 제재를 가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모두 엘리트에게 유리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분할 방법이다. (...) 게다가 피억압자는 자신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억압자가 제안하는 '초대'를 거절할 경우 치르게 될 대가가 무엇인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것은 곧 직장을 잃고 다른 직장에도 갈 수 없는 '블랙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는 것인데, 그나마 그 정도면 최소한의 대가다. 이렇듯 피억압자는 근본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자신의 노동력을 노예화하게 된다.

민중에 대한 조작은 (...) 부르주아지가 민중에게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모델이라는 신화다. 하지만 이 신화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민중이 부르주아지의 말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

대화적 문화 활동 : 협동, 해방을 위한 단결, 조직, 문화 통합

수단으로, 대상으로 전락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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