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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20150716)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기대하고 읽는 한병철의 책이다. 정치기사나 페이스북의 하나로 수렴되지 못하고 개개인이 분출하기만한 댓글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요구다. 투명성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밖으로 표출시킨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정보로 전환된다. 오늘날처럼 비물질적인 생산 방식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증가가 곧 생산성의 증대와 가속화를 의미하게 된다. 반면 비밀스러운 것, 낯선 것, 다른 것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런 것들을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된다.
투명성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유리 인간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투명성의 폭력이 있다. 무제한의 자유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은 전면적 통제와 감시로 돌변한다. 소셜미디어 또한 점점 더 사회적인 삶을 감시하고 착취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가까워진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자유를 집중적으로 활용한다.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훤히 비추고 노출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디지털 통제사회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자유를 빨아먹고 산다. 이러한 사회가 완성되는 것은 그 주민들이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내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에 대해 밝히기 시작할 때, 즉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이 드러나게 될까 꺼림칙해하는 마음보다 뻔뻔하게 그런 부분까지 내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게 될 때이다.

가속화의 압력은 부정성의 해체와 궤를 같이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같은 것끼리 반응할 때, 동일자의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최대 속도에 도달한다. 다름과 낯섦의 부정성, 타자의 저항은 매끄러운 동일자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투명하지 않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무의식이 거침없이 긍정하고 갈망하는 것을 부정한다. (...) 이런 근원적 균열 때문에 인간은 자신에 대해 투명해질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도 틈새가 벌어진다. 그리하여 서로에 대해 투명한 인간관계는 셜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투명성의 강제에는 바로 이러한 섬세한, 즉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오늘날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투명성의 파토스에 맞서기 위해서는 거리의 파토스를 위한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거리와 부끄러움은 자본, 정보, 커뮤니케이션의 가속화된 순환 과정 속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물러나 있을 수 있는 모든 내밀한 공간은 투명성의 이름으로 제거되는 것이다.

투명사회는 정보의 공백도 시간의 공백도 용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유도 영감도 어떤 빈자리를 필요로 한다. (...) 빈틈의 부정성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행복이 없는 사회이다. 시각의 빈틈이 없는 사랑은 포르노이다. 그리고 지식의 빈틈이 없다면 사유는 계산으로 전락하고 만다.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대량화는 경제적 가치의 증가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부정적인 판정은 커뮤니케이션을 손상시킨다.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더 빠르게 후속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다. 거부에 담긴 부정성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없다.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제거하지 못한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불명료함은 오히려 더욱 첨예화된다.

사물들이 모두 상품화되어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긍정사회에서 사물의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사물들이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한다.

제의가치를 지닌 '인간의 얼굴'은 이미 오래전에 사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페이스북과 포토샵의 시대에 '인간의 얼굴'은 전시가치밖에 모르는 페이스로 바뀌어버린다. 페이스는 '시선의 아우라'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전시된 얼굴, 상품 형태를 취한 '인간의 얼굴'이다.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수로과 피트니스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전시적 명령은 가시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절대화를 초래한다. 비가시저긴 것은 전시가치, 주의를 생산하지 못하는 까닭에 존재하지조차 않은 것이 된다.

전시의 강제는 가시적인 것을 착취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표면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투명하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더 이상 이면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반짝이는 표면은 해석학적 심층 구조를 지니지 않는다. 페이스 역시 그렇게 전시가치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투명해진 얼굴이다. 전시의 강제는 결국 우리에게서 얼굴을 빼앗아간다. 자신의 본래 얼굴로 머물러 있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전시가치의 절대화는 가시성의 폭정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미지의 증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라는 강압에 있다. 모든 것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투명성의 명령은 가시화의 압력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적이다.

거리가 없다는 것은 가까움을 뜻하지 않는다. 거리의 소멸은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 가까움은 풍부한 공간을 바탕으로 하는데, 거리의 소멸은 공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가까움 속에는 멂이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가까움은 넓다. (...) 투명성은 모든 것을 탈거리화하여 똑같이 거리가 없는 존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포르노에는 내면도, 숨겨진 것도, 신비로운 것도 없다. (...) 포르노는 단 하나의 일 즉 섹스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적절하지 않은 제2의 모티브를 집어넣어 원 주제를 반쯤 덮어버리거나 지연시키거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거나 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 아무것도 덮거나 숨겨두지 않고 시선에 내던지는 투명성은 외설적이다.

18세기의 세계는 세계 극장이었다. 시 세계에서 공적 공간은 일종의 무대 같은 것이었다. 연극적 거리가 육체와 육체, 영혼과 영혼의 직접적 접촉을 막아준다. 연극적인 것은 촉각적인 것과 대립한다. 사람들은 예식적인 형식과 기호를 통해 소통하고, 이는 영혼의 짐을 덜어준다. 근대는 점차 연극적 거리를 친밀성으로 대체해간다. 리처드 세넷은 이를 티명적인 변화로 본다. 인간은 "외부로 드러나는 자신의 이미지를 뜻대로 다루며 여기에 감정을 투입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극장에서는 객관적 감정이 표현될 뿐, 내면의 심리가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전시가 아니라 재현이다. 오늘의 세계는 행위와 감정이 재현되고 읽히는 극장이 아니라 내밀함이 전시되고 판매되고 소비되는 시장이다. 극장이 재현의 장소라면, 시장은 전시의 장소다. 그리하여 오늘날 연극적 재현은 포르노적 전시에 밀려난다.

친밀성의 문화는 내밀한 감정과 체험의 대상이 아닌 객관적, 공적 세계의 붕괴와 함께 나타난다. 친밀성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회적 관계는 개개인의 내적, 심리적 욕구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참되고 신뢰할 만하며 진정한 것이 된다. 친밀성은 심리학적으로 표현된 투명성의 공식이다. 사람들은 감정과 느낌을 드러냄으로써, 즉 영혼을 노출함으로써 영혼의 투명성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 가지 표현 형식이다.

오늘의 투명사회에는 형이상학적 긴장을 품고 있는 저 신성한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 투명성에는 초월성이 없다. 투명사회는 빛이 없이 속이 비친다. 투명성은 어둠을 밝혀주는 빛의 원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투명성의 매체는 빛이 아니라 빛이 없는 방사선이다.

집은 오늘날 '물질적인 혹은 비물질적인 온갖 케이블'로 온통 구멍이 뚫려버렸다. 집은 '틈새로 커뮤니케이션의 바람이 들이치는' 폐허가 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의 정보가 일으키는 디지털 바람은 모든 것을 뚫고 들어와 투명하게 만든다. 투명사회 전체에 디지털 바람이 불고 있다. 디지털 투명성은 (...) 다만 포르노적일 뿐이다. 디지털 투명성은 또한 세계를 경제적 파놉티콘으로 만든다. 그것의 목표는 마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 주목도를 최고로 높이는 것이다. 완전한 조명은 최대한의 착취를 약속한다.

21세기의 디지털 파놉티콘은 더 이상 하나의 중심, 즉 전능한 독재적 시선에 의해 감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원근법적이다. 벤담의 파놉티콘에서 본질적인 요소였던 중신과 주변의 구별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원근법적 시각의 존재 없이 작동한다. 비원근법적인 투시촬영은 원근법적인 감시보다 더 효과적이다. 모든 것이 전 방위적으로, 도처에서, 모두에 의해 훤히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원근법적 구도에서는 중심적인 눈, 중심적인 주체나 주권이 형성되지 않는다. 벤담의 파놉티콘에 갇힌 수감들이 감독관의 지속적인 현존을 의식한다면,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자유롭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다.

오늘의 통제사회는 특수한 파놉티콘적 구조를 보여준다.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현재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파놉티콘적 시장에 전시한다.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티콘적 통제가 서로를 넘나는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디지털 파놉티콘인 인터넷을 살찌운다. 주체가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가발전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를 노출할 때, 그러니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을 잃게 될까 하는 두렴이 그것을 버젓이 드러내놓고자 하는 욕망에 밀려날 때, 통제사회는 완성된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으로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경향이 강화된다. 소셜네트워크 또한 사적인 것의 전시 공간이 된다. 디지털 매체 자체가 정보의 생산을 공공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시키고, 이로써 커뮤니케이션을 사적인 과정으로 만든다.

존경은 이름과 결부되어있다. 익명성과 존경은 양립할 수 없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촉진되고 있는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은 존경심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며, 조심성 없고 존중할 줄 모르는 문화의 확산에 함께 기여하고 있다. 악플 역시 익명적이다.

이름과 존경은 서로 엮여 잇다. 이름은 인정의 기반이다. 인정은 언제나 기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책임지기, 신뢰하기, 약속하기와 같은 행위 역시 기명성과 연관되어 있다. 신뢰란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할 수 있다. 책임지기, 약속하기 또한 기명적 행위이다. 메시지를 전령과 분리하고 뉴스를 송신자와 분리하는 디지털 매체는 이름을 제거한다.

손이나 타자기로 공들여 편지를 작성하는 사이에 즉각적인 흥분은 이미 수그러든다. 반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을 가능하게 한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그 시간적 특성만으로도 이미 아날로그적인 커뮤니케이션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매체는 감정 매체이다.

격분사회는 스캔들의 사회다. 이런 사회에는 침착함, 자제력이 없다. 격분의 물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반항기, 히스테리, 완고함은 신중하고 객관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대화도,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자제력은 공론장의 본질적 요소다. 또한 거리는 공론장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게다가 격분의 물결 속에서는 공동체와의 동일시 정도도 매우 낮게 나타난다. 격분 속에서는 사회 전체에 대한 염려의 구조를 갖춘 안정적인 우리가 형성되지 않는다. 이른바 분개한 시민의 염려라는 것도 사회 전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자신에 대한 염려일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염려는 금세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린다.

군중은 개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성을 드러낸다. 개개인은 하나의 새로운 통일체로 융합되며, 그 속에서 자기만의 특징을 잃어버린다. 사람들의 우연한 군집은 아직 군중을 형성하지 못한다. 일정한 영혼, 혹은 일정한 정신이 비로소 그들을 외부에 대해 닫혀 있는 하나의 동질적 군중으로 빚어낸다. 디지털 무리에서는 군중의 영혼, 군중의 정신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무리 속에 모여든 여러 개인은 우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디지털 무리에서는 집단을 행동하는 군중으로 엮어줄 정신의 합일을 찾아볼 수 없다. 디지털 무리는 군중과는 반대로 내적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다. 디지털 무리는 하나의 목소리로 표출되지 않는다. 악플도 하나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 때문에 악플은 소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디지털 개인들은 스마트몹에서 보듯이 때때로 뭉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집단적 운동의 패턴은 마치 동물의 무리처럼 매우 순간적이고 불안정하다. 휘발성이 그러한 모임의 특징이다. 게다가 그것은 종종 카니발, 또는 특별한 책임이 따르지 않는 유희와 같은 성격을 보여준다. 이 짐에서 디지털 무리는 전통적 군중과 구별된다. 예컨대 군중은 노동자 집회에서 보듯이 휘발해버리지 않고, 결의에 차 있으며 순간적인 패턴이 아니라 확고한 대오를 형성한다. 하나의 영혼으로, 하나의 이념을 통해 뭉친 군중은 한 방향으로 행진한다. 군중은 굳은 결의를 지닌 까닭에 우리가 될 수 있고, 기존의 지배 관계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행동에 함께 나설 수도 있다. 행동을 함께하기로 결단한 군중만이 권력을 산출한다. 군중은 권력이다. 디지털 무리에서는 이러한 결연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행진하지 않는다. 디지털 무리는 갑자기 생겨났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러한 휘발성에서는 정치적 에너지가 나올 수 없다. 악플 역시 지배적인 권력관계를 동요시키지는 못한다. 악플은 그저 개개인에게 달려들어 망신을 주고 추문에 빠뜨릴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정보의 수동적인 수신자나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송신자이며 생산자다. 우리는 이제 정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정보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고 유통시킨다.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다. 이와 같은 역할의 이중화는 정보의 양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심지어 여론의 사제로까지 여겨져온 기자는 이제 불필요하고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취급될 지경에 이르렀다. 디지털 매체는 모든 종류의 사제 계급을 몰락시킨다. 전반적인 탈매개화는 대표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다. 오늘날에느 누구나 직접 나서려 하며, 자기 의견을 어떤 중개자도 통하지 않고 직접 발표하고 싶어한다. 대표는 참가 혹은 발표에의 동참으로 바뀌어간다.

점증하는 탈매개의 압력은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해 대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몰리고 있다. 정치적 대표자들은 중간 전달자가 아니라 장벽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탈매개의 압력은 더 많음 참여와 투명성의 요구로 표출된다. 해적당이 초기에 거둔 성공은 바로 이러한 매체의 발전 덕택이었다. 디지털 매체가 만들어내는 참가의 강박은 전반적으로 대표의 원리를 위협한다.

대표는 종종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 필터의 기능을 담당한다. 대표는 선별 작업을 통해 정선된 것을 내놓는다. (...) 반면 탈매개의 경향은 많은 분야에서 대중화를 초래한다. 언어와 문화는 평이해지고 저속화의 길을 걷는다.

전략적 행동으로서의 정치는 정보권력, 즉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좌우하는 권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정치는 정보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폐쇄 공간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 기밀은 정치적인, 즉 전략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필수적 구성 요소다. 모든 것이 즉각 공개된다면, 정치는 필연적으로 호흡이 짧아지고 즉흥적 성격을 띠게 되며, 그러다가 결국 잡담과 같이 얄팍해질 것이다. 전면적인 투명성은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을 느리고 장기적인 계획이 아예 불가능한 시간 구조 속에 욱여넣는다. 이런 상황에서 일이 숙성하도록 놓아두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러한 글쓰기는 완전히 다른 것, 유일무이한 것을 생성해내지 못한다. 투명한 글쓰기는 그저 정보들을 합산할 따름이다. 디지털의 걸음걸이 또한 가산적이다. 투명성의 요구는 참여와 정보의 자유를 뛰어넘어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고한다. 그것은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규범적이다.

스마트폰은 모든 형태의 부정성을 제거한다. 이로써 사람들은 복합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스마트폰은 상당한 시간적 넓이 또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행동 방식도 위축시킨다. 스마트폰은 즉흥성과 근시안적인 태도를 장려하고 긴 것과 느린 것을 소외시킨다. 빈틈을 알지 못하는 '좋아요' 버튼은 긍정성의 공간을 생성한다. 타자의 침입으로서의 경험은 거울 앞에서의 상상적 자기 반영 과정을 중단시킨다. 그러나 디지털에 내재하는 긍정성은 그런 경험의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디지털의 긍정성은 동일한 것을 이어나갈 뿐이다.

'손의 위축증'으로 인해 인간은 행동 능력을 상실한다. 뭔가를 손질하고 다듬는 것은 일정한 저항을 전제한다. 행동 역시 저항을 극복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행동은 기존의 지배적인 힘에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맞세우는 일이다. 행동에는 부정이 내포되어 잇다. 행동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하지만, 그것을 동시에 다른 무언가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긍정사회는 모든 저항적 형식을 회피하며, 이로써 행동을 소멸시킨다. 이 사회 속에는 그저 동일한 것의 다양한 상태들만 있을 뿐이다.

한가로움은 노동이 완전히 중단된 곳에서 시작된다. 한가로움의 시간은 다른 시간이다.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명령은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변질시킨다. 일의 시간이 전부가 된다. 휴식도 일의 시간 속에 있는 하나의 국면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의 시간 외에 다른 시간은 없다. 우리는 휴가 때뿐만이 아니라 잠 속에서까지 일의 시간을 들고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도무지 편하게 잘 수가 없는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성과주체들은 마치 피가 안 통해서 꼼짝 못하게 된 다리처럼 그렇게 잠이 든다. 긴장 이완 또는 노동력의 재충전을 위한 것이기에 노동의 한 양태일 뿐이다. 휴양은 노동의 타자가 아니라 노동의 산물이다. 이른바 느리게 살기라는 것도 다른 시간을 창출하지 못한다. 느리게 살기 역시 가속화된 일의 시간이 낳은 결과, 또는 그것에 대한 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일의 시간을 다른 시간으로 변화시키기보다 그저 그 속도를 늦출 따름이다.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하는 스마트폰에서 하나의 치명적인 강제가 생겨난다. 커뮤니케이션의 강제, 사람들은 최근들어 디지털 기기와 거의 강박적 관계에 빠져들었다. 여기서도 자유는 강제로 전도된다. 소셜네트워크는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를 엄청나게 강화한다. 결국 그러한 강제는 자본의 논리로 소급된다.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더 많은 자본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순환이 가속화되면 자본의 순환도 가속화된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무엇보다 숫자로 세어진다. 하지만 우정은 이야기다. 디지털 시데에는 가산적인 것, 셈하기, 셀 수 있는 것이 전부가 된다. 심지어 애착도 호감도 '좋아요'의 형식으로 세어진다. 서사적인 것은 급격히 의미를 상실한다. 오늘날 모든 것이 셀 수 있게 가공된다. 그래야만 성과와 효율성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셀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신뢰가 불가능하다. 아니, 그 이전에 신뢰 대한 필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신뢰는 믿음의 행위다. 그것은 어디서나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현실로 인해 낡아빠진 관념이 되어버렸다. 정보사회는 모든 믿음을 불신한다. 과거에 사람들은 신뢰 덕택에 잘 알지 못하는 타인과의 관계도 맺을 수 있었다. 정보를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신뢰에 타격을 입힌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신뢰의 위기는 매체적 조건과도 관련이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정보의 획득을 지극히 용이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신뢰라는 사회적 관행은 점점 더 중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신뢰는 통제로 대체된다. 그래서 투명사회는 감시사회와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정보를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게되면 사회 시스템은 신뢰에서 통제와 투명성으로 방향을 돌린다. 효율성의 논리가 그러한 전환을 요구한다.

어떤 모델을 채택할 필요 자체가 없다. 빅데이터의 분석은 행동 패턴을 알려주며, 이로써 미래의 예측까지 가능해진다. 가설적인 이론 모델은 직접적인 데이터 비교로 대체된다.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를 밀어낸다. 왜 그런가라는 질문은 그냥 그런 것이라는 확언 앞에서 의미를 일어버린다.

데이터 마이닝은 개인으로서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집단적 행동 패턴을 가시화함으로써 집단적 무의식의 영역을 열어보인다. 시각적 무의식에 대한 유비로서 디지털 무의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리권력은 인간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감시하고 통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점에서 생권력보다 더 효율적이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대중의 사회적 행동에 담긴 무의식적 논리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대중의 행동을 지배한다. 집단적 무의식을 파악하여 대중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예측까지 가능하게 된 디지털 감시사회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발전시킨다. 그러한 사회는 우리를 심리정치적 프로그래밍과 통제의 대상으로 만든다. 이로써 생정치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심리정치의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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