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일기

사진기호학 (20160721)


사진기호학, 진동선 지음/푸른세상

이론편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사진 기호 역시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다. 여기서 기표는 ‘피사체 혹은 사진 속 형상’을 말하고, 기의는 ‘작가가 피사체를 통해서 말하려 했던 것’ 혹은 ‘사진을 볼 때 사진 이미지에 담긴 어떤 뜻’을 말한다. 문제는, 언어가 오해 및 오독을 부르듯이 사진도 오해 및 오독을 부른다는 것이다. 사진에서의 어려움은, 보이는 대로 찍지 못하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려움이다.

세상의 모든 사건은 ‘무엇을 보았는가’에서 시작된다. 이 바라봄은 작가에게도 일어나고 관객에게도 일어난다. 사진을 본다는 것은 작가가 이미 보았던 것을 뒤따라 보는 것이다. 즉 보았던 것을 다시 보는 ‘환원성’이다. 원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보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진은 작가가 보았던 것을 관객이 다시 보기 위해 존재한다. 그 환원의 어려움이 사진의 어려움이다. 사진기호 체계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사진기호학이다.

다이안 아버스가 ‘쌍둥이’와 ‘세쌍둥이를 찍은 이유는 여기서(판별과 판단이라는 상황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사진이라는 기호 체계가 닮은 것 사이에서 차이를 인식시키는 학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물에 사람에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는 이유, 그리고 수많은 단어들이 각각 하나의 의미 혹은 지시물을 가리키는 이유는 각각이 지닌 차이의 절대성 때문이다.

사진은 이성을 통해서 형식과 형상의 차이를 판별하고, 감성과 상상력을 통해서 내용과 의미의 유사성을 공유한다. 그렇기에 사진기호학은 일차적으로 사진 속의 형상이 무엇인지, 무엇과 닮았는지, 무엇을 재현하는지를 차이를 통해 인지시킨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카메라로 대상을 찍으면 대상과 똑같은 모습으로 사진이 나타난다. 사진은 복제, 복사, 모방, 재현, 판박이 과정을 반복한다. 사진기호학은 바로 이 지점, 닮음이 아니라 차이의 변곡점을 지향하고, 그러고 나서 어느 순간 내적 닮음으로 향한다. 그럼으로써 이제는 차이가 아닌 닮음을 통해서 동일성을 추구하게 된다.

선택의 권리

결국 기호학은 기의(뜻과 내용)를 최적화하기 위해 기표(차이)를 최적화하는 방법론이다. 앤설 애덤스의 흑백사진에서는 존 시스템은 기표를 생성하는 선택의 권리이고 도구이다. 존 시스템이라는 선택지는 필름에서 스트레이트하게 프린트한 사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식(기표)을 최적화한다.

기호의 제국

깃발을 세우는 해병대원은 승리를 상징한다. 연출해서 찍었다고 뜻이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사건으로서 사진은 달라진다. 숨겨진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기호학의 대상이 된다.
조 로젠탈은 어째서 연출을 해야 했을까? 왜 의도를 숨겼을까? 그 장면이 왜 극적인 장면이고 감동적인 장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바로 이것이 기호의 복선이다. 은폐된 의미망이다.

대체물에 대해서 누구나 아는게 아니라 아는 사람만 알아차릴 때 기호로 판독되는 것이다. 즉 아는 사람만 알아차릴 때 사진기호학은 힘을 발휘한다. 기호 체계의 본질은 변함없이 다음과 같다.

기표(signifiant, 시니피앙, 형상) + 기의(signifie, 시니피에, 의미) = 기호(sign)

이 때부터 주제사진과 연작사진이 출현하는데, 사진 한 장은 ‘단어’처럼 활용되고 주제사진이나 연작사진은 ‘문장’처럼 활용되기 시작한다.

이미지와 언어적 표상

레이 메츠커의 <커플릿>(1968)은, 한 장의 사진에 두 개의 시간과 공간, 두 개의 기호와 의미를 위해 두 개의 프레임으로 짠 사진이다. 이른바 ‘딥티크’ 형식이다. 딥티크 형식은 하나의 프레임, 한장의 사진으로는 언어성이 약하다는 인식에서 출현하게 되었따. 사진의 역사에서는 이처럼 단사진을 극복하고자 하는 수많은 노력이 있었다. 여러 장을 찍을 수 있는 롤필름(roll film)이 나온 뒤에도 사람들은 사진을 한 장으로 여겻다. 이는 그림의 영향이다.

지각론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존 사코우스키가 <사진가의 눈>에서 강조한 것도 이것이다. 인식의 눈과 의미의 눈이다. 사진가의 입장에서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의미화하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사진적 고민이 존 사코우스키의 <사진가의 눈>에 담겨 있다. 이러한 고민은 기호학적 고민이며,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보이는가에서 시작해서 어째서 그렇게 보이는가로 되돌아오는 환원적 고민이다. 메를로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고민했던 것이다. 그것은 주체에게 주어진 시선의 권리, 즉 각각의 사진은 찍은 사람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권리(바라봄)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깊이 몇 격의 차이는 있어도 바라봄과 표현 자체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각자의 몫일 뿐이다.

내면의 감정을 구릅의 감정으로 치환하려고 했다. 사진가들도 누구나 이 같은 미학적 감정이입을 위해서 부합하는 대상을 찾는다.

이미지 수사학 : 타나토스

사진으로 말을 잘하려는 것이 이미지 수사학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잘할 수 있을까? 또 언어의 성질을 사진에 어떻게 끌어들일 수 있을까? 이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문학의 힘을 빌린다. 문학에는 세 가지 수사학적 테제가 있다. ‘타나토스(죽음)’, ‘멜랑콜리(허무)’, ‘노스탤지어(향수)’이다.

다시 읽어야 함

기호화법 : 이미지 – 텍스트

문학은 문장(텍스트)를 기표로 삼아 읽을 때마다 끊임없이 이미지(기의)를 생각해낸다. ‘시니피앙(텍스트) + 시니피에(이미지) = 기호(작용)’이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떤까? 사진은 어떤 기호 작용을 하는가? 이미지를 기표로 삼아 쉼 없이 문장(텍스트)을 기의로 이끌어내는 기호작용이다. 문학의 기호 작용과 정반대이다.

슈테판 게오르게는 “언어가 없는 곳에 사물은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언어의 우월성을 강조한 말이지만 사물은 언어만으로는 그 존재감을 획득할 수 없다. 사물의 존재감은 이미지가 보완될 때 온전하게 획득된다. 이는 이미지도 마찬가지이다. 말을 바꿔서 “이미지가 없는 곳에 사물은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했다 해도 언어가 없으면 사물의 존재감은 없다. 결국 사물은 언어로 존재하는 것이다. 소쉬르 기호학의 핵심은 이것이다. 서로 시니피앙, 시니피에가 되어 언어는 이미지, 이미지는 언어로 서로 탐색하는 것이다.

사진은 그 자체로만 보면 코드 없는 메시지이다. 그 자체가 현실, 기표와 기의가 한 몸인 기호이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가 된다. 너무 완벽한 사실, 실재로 해석되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 없는 무용지물이 기호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지만 사진은 기호이다. 해석을 필요로 하고 해석을 원하는 기호이다. 기호학의 본질은 보다 많은 소통, 보다 완벽한 소통, 보다 충실한 소통에 있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활용 또한 사진의 모습이다.

언어는 실존하는 세계에 대한 텍스트적인 해명이다. 이에 반해 사진은 실존하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적인 해명이다. 번역의 순서가 바뀔지언정, ‘언어-이미지’ 관계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을 해명하는 방법은 언어기호와 이미지 기호를 통하는 방법이다.

보도사진이나 기록사진은 제목이나 컨셉을 매우 중요시한다. 이것들이 지표기호로서 곧장 내용으로, 해석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예술사진은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제목 외에 추가로 설명문을 붙이는 것은 코드를 강요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사진이 텍스트 기호가 될 수 있을까? 일단 기본적으로는 사진이 언어적 뜻을 숨기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적 뜻이 여러 장의 사진으로 이미지화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층(복심)적 해석이 가능한 시퀀스 플롯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석 장 정도가 시퀀스 이미지일 때 사진도 텍스트로서 텍스트 기호학이 될 수 있다.

사진이 텍스트 기호학이 되려면 최소한 석 장이 필요하다. 또 사진 처럼 지시체가 분명한 지표기호가 스토리텔링에 이르려면 기본적으로 주어-동사-목적어 관계여야 한다. 또 석 장 이상일 때 사진도 메타기호로서 삼단논법(서론-본론-결론)이 가능하다.

기념기호와 인지심리

사물에 대한 사진가의 인지심리는 매우 미묘하다. 특수한 추상으로 나타날 수 있고, 개념적인 추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또 심리적인 추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근간은 사물에 대한 인식의 감가과 그것이 표출되는 기호적 특징이다.

두개의 책상다리만 보여주는 것에서 증폭된다. 이러한 인지심리는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에서 한 개의 헤드라이트를 감추는 은닉과 누설의 인지심리학이다. 반쯤만 드러나는 커튼, 아주 살짝만 빛나는 반사도 그렇다. 실재를 감추는 인지심리의 모습이다.

김정수의 <기억의 단편>(2002)도 같은 범주에 있는 사진이다. 현실의 실질적인 상황속에서 찍었지만 현실감을 밀어낸다. 물 위에 작은 대야가 떠 있다. 작은 대야에도 물이 담겨 있는데 물고기 한마리가 죽은 듯 누워 있다.작은 대야, 죽은 듯한 물고기는 가시적인 기표이다. 현재의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작가의 인지심리는 어떤가. 어둠과 밝음의 대비, 매우 정적인 시간의 고요, 여기에 현실감을 제공하지 않으려는 의도된 인지심리에 의해 낯선 시간, 현실 같지 않은 시간의 감각이 흐른다.

기호화법과 시간 형상

사령 사진은 어떻게 시간을 재현할 수 있을까? 사진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까? 사진은 시간의 흔적, 시간이 자나간 자리이지 시간 자체는 아니다. 시간은 불가시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시적인 시간을 표상한다는 것은 기호화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니까 ‘다른 것을 통해서 의미화하는’ 방식이다.

언어학에 비유를 위한 화법들이 있다. 직유법, 은유법, 환유법, 제유법, 반어법 같은 것들이다. 이 비유법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어떤 것을 다른 것을 통해서’ 말한다는 것이다.

직유법은 ‘하나를 비슷한 다른 것과 견주는 것’을 말한다. 즉 ‘~같이, ~처럼, ~인 양’의 형식으로 유사성의 법칙이 강하게 작용하는 화법이다. 유사한 어떤 것으로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X는 Y와 같다’라고 말하는 화법이다. 예컨대 직유 형상으로 ‘고슴도치-털-솔’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은유법은 비슷하거나 그렇지 않은 두 가지 사물을 견주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은유법은 친숙한 어떤 것을 전혀 생소한 다른 것과 연결시킬 때 의미가 발생하는 화법이다. ‘X는 Y이다’라고 말하는 화법이다. 친숙한 X로 Y라는 생소한 방식과 연결할 때 X와 Y가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이 은유법이다. 은유법은 일종의 전이, 전사, 전가이다. X가 실제로 어떠한 성질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은유적으로 그 성질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예컨대 ‘남자는 늑대, 여자는 여우’ 같은 표현이 은유법이다.

환유법은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거나 직접적으로 관계될 때, 의미 전달을 위해 그것들을 서로 대체하는, 인접성을 이용한 화법이다. 충분히 증거되는 것, 사라지고 없지만 그것이라고 지시되거나 믿을 만한 대체물을 유추하는 방법이다. 요컨대 인접한 것,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말하는 방식으로서 흔한 예가 연기-불, 풍향계-바람, 키스 자국-입술, 발자국-발, 지문-손가락과 같은 표현이다. 사진은 환유 화법에 속한다.

제유법은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말하는 화법이다.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작은 일부분, 누구나 아는 특정 부분을 통해서 커다란 전체를 표사앟는 방법이 제유법이다. 제유법의 특징은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말을 감추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고 있지 않은지를 깨닫게 하는 화법이기도 하다. 흔한 예로, ‘빵-식빵, 들-조국, 강태공-낚시, 감투-벼슬, 흰옷-한민족’과 같은 표현이 제유법이다. 같은 성질의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비유하는 화법이다.

반어법과 역설법은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는 어떤 것을 말함으로써 원래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비유법이다.

구본창의 사진은 흐르는 강물과 낡은 시계를 통해서 시간을 표상한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시계도 흐르고 강물도 흐른다는 사실을 표현함으로써 ‘숨은 곧 시간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사진 속의 포탄은 그곳이 60년동안 미국의 땅, 미군 폭격기의 터전이었음을 지시한다. 시간의 잔해, 시간의 상처를 그 몸(폭탄)으로부터 나온 대체물(불발탄)임을 환유적으로 말하는 ‘시간 풍경’이다.

화면을 빠져나가는 바쁜 걸음, 담벼락을 통한 또 다른 시간, 몰락하는 시간의 그림자를 통해서 전체를 말하는 제유법적 시간의 모습이다.

<경산극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흘러간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대조시키는 극장 건물과 신식 자동차의 모습이 대조의 기호화법으로 자리하고 있다.

기호 공간과 코드 구조

눈에 멋지고 다름답게 보이는 피사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누구나 좋아하는 피사체는 깊은 정신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코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또 보이는 대로 찍는 것이 아니라 내재한 정신의 깊이, 그러니까 찍고 싶은 코드를 갖고 싶어한다. 이 같은 코드로 인해 별로 예쁘지 않고, 눈에 띄지 않고, 일반 사람들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은 하찮은 일상의 피사체들이 더 눈에 들어오게 된다.

리처드 웰런은 1981년에 출간한 <더블 테이크>에서 사진작가들에게는 공통의 미적 예술적, 지각적 코드가 존재한다고 밝힌다. <더블 테이크>는 사진가들이 어떻게 우연히 동일한 피사체 혹은 동일한 프레임으로 찍었는지 그 사례를 모은 책이다.

기호학으로서의 유형학

이러한 사진들이 20세기에 들어서는 유형학이라는 이름으로 인물사진 분야에서 맹위를 떨친다. 유형이란 비슷한 것끼리 짝을 지어 나타나는 꼴이다. 그래서 유형학의 사진은 같은 모양, 같은 형태, 같은 꼴들이 나란히 배열된 모습이다.

기호학에서 유형은 ‘차이’를 목적으로 한다.

재현은 유사성의 차이 혹은 차이의 코드를 전제한다.

“유형항적 사진은 유사한 것들을 모아 상종한 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라면, 도감은 유유한 것들을 모아놓고 그 서로에서 다름을 찾아내도록 하는 것이다 해석할 수가 있다.”

기호화법에는 ‘특정한 꼴(타입)’이 있다. 이 꼴에 의해서 유사성이 드러나는 기호화법이 있다. 그 꼴에 의해 사진의 코드가 판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유형적 지표성은 전체 이미지 간의 통합성은 강화시키지만 이에 못지않은 개별 사진들의 중요한 본성들은 간과하게 한다. 가령 오래된 머그샷은 재현된 동일성일 뿐이지 범죄자의 본성은 아닌 것이다. 비슷하게 나열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서로 닮지 않았고 닮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머그샷은 그저 기호로서, 코드로서 유사, 동일을 지시할 뿐이다. 그리고 동일성은 항상 대립을 상정한다. ‘닮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차이’를 누설한다.

조형기호와 오캄의 면도날

사진에서 미니멀은 기하학적 구성의 단순성으로 나타났다. 복잡한 형태 및 형상을 최대한 피하고 보여줄 것만 명료하게 보여주는 간결한 기하학적 구성 및 구도로 나타났다. 바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등장한 것이다. 이른바 미학으로 불린 새로운 조형기호는 기하학적 단순미를 목표로 했다. 명료한 시각, 군더더기 없는 구성, 쉬운 소통까지 브레송 스타일이 시각조형의 새로운 힘으로 등장했다.

브레송의 사진미학에서 ‘결정적 순간’은 셔터 찬스의 문제가 아니라 사각틀 안에 구축한 단순함이다. 단순미, 군더더기 없는 형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기하학적 미니멀의 미학이다. 이것이 미니멀 조형기호, 오캄의 면도날 같은 조형 코드이다.

메타기호학 : 사진 도상

사진의 메타기호는 ‘코드의 코드화’의 모습이다. 기호로서 기호를 말하거나 기호가 또 다른 기호를 지시할 때 나타난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현실에서 단 한 번, 유일하게 일어난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에 한계가 있고 지시체 이상의 의미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진 기호학이 메타기호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이미 존재한 강력한 상징기호를 사진적으로 다시 한 번 재현함으로써 효과를 얻는 방식이다.

실전편

선 원근법

중앙에서 사건이 발단하여 좌측으로 전개되어 마침내 우측에서 완료되는, 전형적인 중세의 제단화 혹은 삼단 구조의 스토리텔링 형식이다.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그림이 현실을 묘사하는 스토리텔링(서사) 기법은 이런 식이었다. 사건은 시간차를 두고 진행되고 그에 따른 내용들이 진행되는, 한 폭의 그림에 모든 내용을 담는 방식이었다.

35mm 소형카메라로 원근 효과를 구사한 사람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다. 약 40년간의 전성기 동안 브레송은 기하학적 원근법을 효과적으로 구사했다. 그의 사진은 자연스러운 원근감에 의해 시각의 흐름이 전경, 중경, 원경으로 흘러간다. 또 앞쪽에서 뒤쪽으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반드시 시선이 흐르도록 원근 기하학적으로 구성했다.

선 원근법이 제공하는 사진기호학적 효과는 무엇일까? 선 원근법을 활용한 사진은 이미지 전달 효과가 뛰어나다. 또 조형과 사진심리가 일치하기 때문에 기호적으로 전달의 힘이 크다. 선 원근법의 구조는 현대에 오면서 두 가지 모습으로 발전했다. 하나는 전통적인 직선 강조의 선 원근법이고, 다른 하나는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은 곡선 강조의 선 원근법이다. 직선 중심의 소실점 사진은 도시사진, 건축사진에서 많이 보이고, 곡선 중심의 소실점 사진은 예술사진, 순수 사진에서 많이 나타난다. 직선 선 원근법이 엄격하고 정중하고 딱딱한 느낌의 힘과 집중을 보여주는 남성적 성질 및 감각이라면, 곡선 선 원근법은 원만하고 포근하고 섬세하며 유연한 느낌의 부드러움, 율동과 리듬감을 보여주는 성질 및 감각이다. 그러나 이는 선이 주는 감각과 강정태일 뿐 직접적인 시각 효과 혹은 기호적 요소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코드로서 선 원근법적 표현(기표) 효과이고 내용(기의) 전달의 힘이다.

기하학

사진기호학은 기하학적 형태들의 위치, 크기, 모습에 주목한다. 사진기호학은 사물과 사람까지도 기하학적 요소로 편입시킨다. 그뿐 아니라 사진기호학은 기호를 통해서 표현되고 내용을 해독할 수 있는 기하학적 사진을 꿈꾼다. 그러려면 기하학적 도형을 포함한 유사한 사물과 사람의 형태 및 형상까지도 기호적인 해독과 의미 전달이 가능해야 한다.

(…) 찰스 실러이다. 그의 사진의 특징은 기하학의 실재성이다. 그는 실재하는 현장에서 기하학적 구조물을 찾았으며, 정형화된 유형학과는 다르게 자유로운 시각에서 기하학적 요소들을 추려냈다. 그의 <포드 자동차 단지>(1927)가 보여주는 기호적 메시지는 포드 자동차를 통해서 말하는 현대 기술문명의 구조이다.

독일사진가 마르틴 되르바움의 <레지던스>(1997) 시리즈는 자신의 공간에서 기하학적 요소들을 세밀하게 찾아낸 다음 디지털 효과를 적절히 가미한 사진이다. 거주 공간에 실재하는 기하학적 구조들, 이를테면 먹는 것, 자는 것, 일하는 것, 씻는 것에서 기하학적 도형, 도상 구조들을 바라보게 한다. 아마도 요즘 젊은이들의 생활 공간인 원룸이 기하학의 무대일지도 모른다. 빌트인이라는 새로운 레지던스 문화는 기하학적 시스템 사회를 보여준다.

귀도 모카피코의 <시계 시리즈>(2006)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사회의 빈틈없는 구조를 메시지로 전한다. 모카피코가 보여주는 독일제 시계와 스위스제 시계는 인체 조직과 같이 완벽한 ‘조직’ 시스템을 상징한다. 정확하고 엄격하고 완전무결한, 단 0.00001초도 오차가 없는 명품 손목시계의 기하학적 구조를 통해서 시곗바늘처럼 움직이는 현대사회를 상징한다.

빅터 슈레저의 <구성으로부터>(2002-2004)도 주목할 만한 사진이다. 빅터 슈레저는 변형기하학을 선보이느 작가이다. (…) 뷰카메라의 무브먼트를 활용하여 원근 왜곡을 시도하거나 포토샵에서 원근 왜곡을 이용하여 기하학의 왜곡을 시도한다. 예컨대 신즉물주의 기하학적 사진처럼 일상용품들을 이용하여 평범한 기하학적 일상성을 강조하거나 클로즈업을 통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 물질적 표상 행위만 드러내는 스타일이다.

프레임

스티븐 쇼어가 말한 프레임의 정의를 새겨야 할 듯하다. 그가 내린 프레임의 규정, 그러니까 그가 “사진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는 프레임이라는 사실과 세상은 테두리가 없는데 하나의 사진은 반드시 테두리를 가진다는 것, 또 사진은 세상으로부터 테두리 안의 것만을 잘라내 온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런 프레임이기에 이미지의 내용과 의미를 통한 어떤 서늘한 반향이며, 프레임이 사진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단박에 둘레 짓고 사진가가 찍고자 하는 의도, 자신 앞에 펼쳐진 대상, 사람, 사건들 그것들의 프레임을 결정하는 행위야말로 바로 사진 행위가 아니겠는가”라고 정의한 부분을 주목해야한다.

사진의 프레임은 일련의 물리적, 심리적 정보의 집합체이다. 사진가의 시각, 창작 과정, 사고와 감정까지 중요한 기호적 단서들이 내재해 있다. 형상과 배경의 크기, 면적, 형태, 위치가 있으며, 프레임에 의해서 경계선이 그어지고, 또 이것들에 의해서 이미지 공간이 규정된다. 그러니까 화면 안쪽과 화면 바깥쪽으로 나뉘고, 화면 안팎으로 존재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형상의 움직임과 방향성이 지시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형상과 내용이라는 기호적 지각지표 및 지각의 요인들이 조형 정보로 수용된다. 사진 해석에 도움을 주는 지각 정보의 총체들이 들어있는 곳이다. 그리고 여기에 주요 물리적 요소가 있다. 시각 대상의 자극과 운동, 대상들의 위치, 방향, 이동의 형태는 곧바로 프레임의 상태를 지각하게 하는 물리적 정보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진에 찍힌 대상을 전유하는 것이라고. 여기서의 전유란 말 그대로 어떤 것을 독차지하는 것이다. 사진가가 피사체를 독차지한다는 말이다. 사진은 여타 예술과는 달리 협업이 불가능하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오로지 혼자이다. (…) 전유에 의해서 사진은 대상과 심리적인 관계를 맺는다.

사진가들은 한 컷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고 구도라는 말도 잘 쓰지 않는다. 세상을 멈춤이 아니라 흐름으로 보기 때문이다. 사진이란 한 장부터 찍어나가는 것이지만 연속적인 프레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중요한 사진적 인식이다. 그 출발점은 망설임 없이 ‘1950년대 로버트 프랭크’라고 답할 수 있다.

그에게 사진의 프레임은 단절이 아니라 삶의 연속과 같았다. 또 프레임이란 작가와 아무 관계 없는 한 컷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삶과 시선의 교차점이다. 그의 사진들이 대단한 이유는 이렇듯 소소한 삶을 담았다는 데 있다. 로버트 프랭크는 사진의 개념과 프레임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현대사진이 로버트 프랭크에게 빚진 것은 이것이다. ‘프레임은 마음을 따른다.’는 가름치이다. 어떤 형식도 어떤 규칙도 어떤 제한도 심지어 화면을 보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잊어야 한다는 무심함, 무정형의 정신을 선물한다. 투명한 영혼들의 곤충채집처럼 프레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그저 잘 찍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진실에 충실하라는 무욕의 선물이다. 대상 앞에서 깨끗하고 투명해지라는 말이다.

로버트 프랭크가 프레임의 심리적, 정신적 요소들을 강조했다면 1960 ~ 1970년대 시카고 사진의 중추적 인물이었던 레이 메츠커는 프레임의 물리적 특성과 심리적 특성을 일치시키는 기호적 요소를 강조했다. (…) 레이 메츠커는 그 같은 프레임의 물리적 요소가 어떻게 심리적, 내용적 요소와 결합하는지를 ‘더블 프레임’을 통해서 기호학적으로 보여준 사진가이다.

우선 물리적으로 두 가지 조형 요소를 놓치지 않는다. 한 가지는 프레임 안에 있는 형상들 간의 관계성이고, 다른 한 가지는 프레임 안팎을 들어오고 나가는 형상의 방향성이다. 프레임 극단에 위치한 형상들, 상하좌우로 프레임을 들어오고 나가는 형상들의 방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실제로 일어났던 형상들의 방향, 형상들 간의 관계항에 의해 표현과 심층이라는 ‘기호-서사’ 구조를 이룬다. 이것이 기호학적 프레임의 정체이고 텍스트 층위로서 프레임의 본질이다.

또 하나는 심리적, 정신적 프레임의 국면이다. 프레임 속에서 형상들은 잘리고 함축되고 은유된다. 즉 과감하게 단절된 형상과 그 파편에 의해 암시와 누설의 미학으로 이끌며, 이런 심리적 요소들은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은닉의 상상력이다. 미스터리를 중폭시키는 기호이다. 이와 같은 프레임 워크가 이갑철이 의도하고 합축하려는 무속성, 토속성, 신비성 혹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예기치 않게 출렁이는 알 수 없는 ‘충돌과 반동의 방향’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은닉은 불안전한 상태이다. 이러한 불명료성, 형상의 결여가 부분들을 통해 더 큰 존재의 형상, 더 깊은 정신세계로 이끌게 된다. 평범한 프레임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주제와 소재, 대상들이다.

구성

그레마스는 기호의 형태를 자연기호와 인공기호로 이등분한다. 기호 생성이 자연적이면 자연기호, 인공적이면 인공기호이다. 그림, 조각, 디자인, 건축은 구성에 의한 인공기호이다. 그중에서도 그림이 가장 대표적인 인공기호이다. 우리는 그림 앞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1. 무엇이 재현되었는가
  2. 어떻게 생상되었는가
  3. 어떻게 지각되었는가

그레이스는 이 세 가지 문제를 풀기 위해 시각의 기호학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림이라는 기호(재현)을 보고 그림이 어떻게 구성(생산)되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지각(해독)되는지, 그리하여 마침내 그림의 의도(상징)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시각기호학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레마스의 시각기호학은 먼저 공간적 구조와 시각적 구조로 나뉜다. 그런 다음 표현의 층위와 심층의 층위로 나뉘고, 마지막으로 형태 범주와 위상 범주로 나타난다.

먼저 구도, 구성, 프레임에 대한 개념부터 구분해보자. 구도는 윤곽의 질서이다. 머릿속이건 백지 위이건 혹은 캔버스 앞에서건 형태와 형상의 윤곽선을 그려보는 것이 구도이다. 구도는 무로부터 예측된 형태 및 형상의 길과 방향이다. 기초를 잡거나 방향을 잡거나 형태 및 형상을 배치, 배열하는 백지 상태의 도법이다. 그에 반해서 구성은 구도로부터 나타나는 실행적 배치이다 질서이다. 그림에서는 사물의 시각적인 배치 및 질서이고, 조각에서는 형태가 잡힌 공간적 배치 및 질서이다. 구도가 건축의 설계도에 가깝다면 구성은 설계도에 따른 건축에 가깝다.

이런 까닭에 도법으로서 구도는 사진에 알맞은 용도가 아니다. 물론 머릿속에서 상상하거나 이미지를 스케치하듯이 생각 차원에서 쓸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이에 반해 구성은 사진에 제한적으로 쓸 수 있다. 예컨대 작가가 피사체에 의도적으로 개입할 때, 존재하는 오브제를 특정 방향으로 이동시킬 때, 화면에 존재했던 오브제를 없애거나 없었던 오브제를 화면에 추가할 때, 이미 질서화된 오브제들을 재배치, 재구성, 재배열, 재형성할 때, 또 연출사진처럼 시나리오에 따라 스테이지를 만들고 오브제들을 하나씩 구축할 때 구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이른바 구성사진이 되는 것이다.

구성사진은 인공기호이다. 각본을 따르건 조형 의지에 따르건 구성 사진은 구성을 통해서 창조된 상징기호이다. 이런 시각기호들은 오브제의 배치, 배열이 자유로울 뿐 아니라 형태 및 형상이 설정된 개념에 따라 연속적, 연결적으로 이루어진다.

(…) 개념은 의도이다. 그에 따라 오브제 또는 여타의 사물을 구성(표현)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그림의 방식이다. 이렇게 개념을 앞세우면 사진은 보기가 아니라 읽기가 된다. 스트레이트 사진이 ‘보기’ 중심의 사진 기호인 것도 구성사진이 ‘읽기’중심의 사진기호인 것도 기호 개념에 따른 것이다.

결과가 사진일 뿐 구성은 그림 방식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요소가 있다. 기호의 발신자이다. 즉 뮤니츠 사진의 발신자는 바로 작가 뮤니츠이다. 구성이 작가에 의해서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점에서 가령 일반 사람들이 화가의 그림을 사진으로 찍는 것이다 조각공원에서 조각상을 사진으로 찍는 것이나 건축물을 사진으로 찍는 것과 다르다. 이런 사진들은 구성사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호의 발신자가 피사체를 창조적으로 구성하거나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성사진의 기호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 공간의 위치, 척도, 수치, 질서, 구조, 방향 등 의도된 조형과 사진심리가 한데 어울리는 사진이다. 현실 공간이 아니기에 시각적 요소가 우선하며, 형태 및 형상들의 지각적 요소가 강하기에 해석의 여지가 크다.

크기

스티글리츠가 놀란 건 물리적 지표기호로서 드러난 상대적 스케일이었다. 또 심리적(혹은 이념적) 크기로서 사진 속에 은닉된 JP모건(자본가)이라는 부르주아의 모습과 가난한 노동자라는 소외된 프롤레타리아의 상대적 모습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크기의 문제인지, 또 얼마나 상대적인 심리의 문제, 표현적인 문제인지 스티글리츠는 알아보았던 것이다.

사진에서 크기의 문제는 중요하다. 상대성을 지시하고 지향한다. 어떤 것의 크기는 어떤 것을 향한 크기이다. 상대성 없는 크기는 없으며 세상의 모든 크기는 대응하는 크기이다. 크기는 대항의 스케일이다.

거리

본다는 것은 거리를 전제로 한다. 거리 없는 바라봄은 없으며 가깝든 멀든 모든 바람 속에는 반드시 거리가 있다. 사진은 그런 거리 속에서 존재한다. 우리는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다. 바라본 곳에 누군가가, 어떤 것이 있다. 우리가 보았던 그 거리들은 어느덧 마음의 거리가 된다. 그렇게 사진의 거리는 피사체를 향한 물리적 거리를 넘어서서 마음의 거리가 되며, 그 심층은 신경숙의 소설과 박완서의 이야기처럼 “말해질 수 없는 거리” 그리고 “대상과 시점 사이에서 얼마만큼 거리를 유지하고 바라보아야 가장 쓸쓸하고, 적당히 슬프고, 그리고 보기 싫은 것이 지워진 아름다운 구도가 되는지를” 알게 하는 거리가 된다.

로버트 애덤스는 <미국 서부>(1968~1984)는 중립적 거리 미학이다. 1970년대의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의 거리를 밝히라는 시대의 요구에 “저는 중립적입니다.”라고 밝히는 로버트 애덤스의 거리 미학을 보여준다. 어느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간적 태도로 시대 풍경을 바라보겠다는 기호적 표명이다. 이렇게 대상의 거리를 왜곡하지 않고 과장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끌어당기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고 중립적 태도, 중립적 거리를 유지하며 세상을 표현은 1970년대 일군의 사진가들을 뉴 포토그래픽스 사진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거리 미학은 기호학적으로 어떤 형태의 코드와 연결되는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호적 연결망을 갖추고 있다. 첫째는 중립적 화각이다. 지나친 클로즈업도 없고 지나친 와이드도 없다. 둘째는 중립적 카메라 앵글이다. 지나친 하이앵글도 없고 지나친 로우앵글도 없다. 셋째는 중간적 피사계 심도이다. 대형카메라를 사용하되 지나치게 얕은 피사계 심도도, 지나치게 깊은 치사계 심도도 없다. 넷째는 중간적인 사진의 톤이다. 지나치게 밝은 톤(하이키)도 없고 지나치게 어두운 톤(로우키)도 없다.

크루드슨의 사진의 무대는 대부분 불 켜진 실내이다. 거기에 침대가 있고 거울이 있고 고립된 사람이 서 있거나 걸터앉아 있다. 상실과 고립과 단절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된 구성이다. 침대로부터 누워 있는 사람과 앉아 있는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의 물리적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누가 이들을 심리적으로 가깝다고 할 것인가? 물리적 거리가 결코 심리적 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떨어진 꽃이 부서진 창이, 깨진 거울이 반영하다. 그레고리 크루드슨은 보편적인 일상에서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거리의 문제를 사진기호적으로 풀어낸다. 메이킹 포토에 의존한 거리 미학이다.

사진은 실재하는 거리를 재현한다. 실재 속에 거리고 있고 실재 속에 관계항이 있다. 그것들은 사진가의 정신의 거리이고 사진가의 실존을 지배하는 인식의 거리이다. 물론 사진의 거리는 사실적인 디테일의 거리일 수도 있고 또한 대상을 향한 사진가의 주관적, 객관적, 상상적 거리일 수도 있다. 결국 기호학적으로 조형 의지의 거리이자 사진심리의 거리이다.

앵글

첫째, 정각이다. 눈높이 각도로 카메라가 피사체를 눈높이게서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평 앵글이다. 가장 많이 활용되는 보편적인 앵글로 인간의 눈과 같은 일반적인 시각이다. 안정된 화면을 제공하지만 극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어서 대체로 평이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할 때, 등장인물의 눈높이에 맞춰서 찍을 때 구사하는 앵글이다.

둘재, 부감이다. 위에서 피사체를 내려다보는 하이앵글을 말한다. 이벤트나 사건, 인물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해주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한눈에 알게 해준다. 건물이 밀집한 도심을 부감으로 촬영하면 사각형 건물의 모양과 격자무늬 도로 등을 평면적으로 묘사할 수 있어 회화적인 조형미를 추구할 수 있다. 또 부감으로 촬영하면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기하학적 장면을 얻을 수 있다. 기술적, 심리적인 목적으로 구사하는 앵글이다.

셋째, 앙각이다. 피사체를 밑에서 올려다보는 로우앵글을 말한다. 건축물을 촬영할 때 앙각으로 찍으면 하늘을 향해 치솟은 건물의 권위를 묘사할 수 있으며, 인물을 로우앵글로 찍으면 위압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 또 앙각은 피사체를 더 크게 보이게 하거나 원근을 과장 또는 왜곡하여 특수한 효과를 얻고자 할 때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 예술 표현에서 자주 구사하는 앵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앵글은 대상을 향한다는 점에서 ‘시점’이다. 또 높낮이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위치’이고, 방향이 유도된다는 점에서 ‘화면’이며, 지향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효과’이다. 앵글에는 이 네가지 물리적 요소가 뒤따르며 이것들에 의해서 심리적 요소가 결정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대개 ‘새의 눈’, ‘독수리의 눈’ 또는 ‘신의 눈’이라고 한다. 높은 데서 굽어 살피는 앵글이라는 뜻이다. 부감은 기하학적 조형미, 높은 정보의 충위, 신선한 조망, 새로운 감각과 인식을 제공한다. 또 인간과 건축물 사이 혹은 인간과 도시 사이에서 놀라운 대조 및 대척의 공간감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부감은 ‘조형-사진심리’를 극대화하는 기호학의 앵글이다.

시간

현재의 시간은 시곗바늘의 시각과 같은 것이다. 현재의 시간은 기호학적으로 시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기호화할 때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라는 시간차 혹은 시간의 틈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호학적으로 시간 표상이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시간은 이동과 변화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하나의 전제일 뿐이다. 추이를 예측할 수 있고 감각을 통해서 전체를 헤아릴 수 있는 시간은 표상의 지표기호가 될 수 있다.

시간은 기호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기호학에서 시간은 오로지 표상되는 시간이다. 시간의 지속, 시간의 연장, 시간의 경과지표로서 표상되는 지금이 곧 시간의 얼굴이다. 지각의 대상은 눈앞의 시간이다. 사진의 시간, 사진 속 시간은 지각하고 지각된 존재들의 시간이다. 사진은 두 개의 시간 축으로 구성된다. 대상과의 만남의 시간으로 구성되고, 대상으로부터 추출된(지각한) 시간(표상)으로 구성된다. 물리적 시간이 대상의 인식과 카메라의 격발이라면 심리적 시간은 시간 표상의 감각과 감정이다. 또 과학적 시간이 촬영, 현상, 인화의 시간이라면 직관의 시간은 인화지라는 시간 기호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시간을 주제로 하지 않더라도 찍는 수간 자체가 시간으로 구성된다. 대상을 바로보지만 대상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이고, 대상을 포착하지만 대상의 시간을 포착하는 것이며, 대상을 훔쳐오지만 대상의 시간을 훔쳐오는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또 다른 시간이 있다.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이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시간 표상이 아니다. 생성과 몰락의 관념의 시간이거나 지나간 시간 혹은 미래의 상상꼐로서의 시간이다. 오로지 현재만이 지각된 대상으로서의 시간이다.

보지 않아도 인과관계를 통해, 유추와 연역을 통해 알 수 있는 시간의 표상 방식이다. 부모가 있기에 자식이 있다는 것은 인과관계 및 유추의 결과이다. 부모가 자식의 증명이고, 자식 또한 부모의 존재 증명이다. 기호적 방식이다.

심도

심도는 과학이다. 물리적인 사진기호학의 요소이다. 심도를 깊게하면 무엇보다 정보의 층위가 극대화되어 무엇을 찍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반대로 피사계 심도를 얕게 하면 정보의 층위가 극도로 약화되어 무엇을 찍었는지 알기 어려워진다. 즉 심도가 깊으면 정보성이 커져서 소통이 쉽고, 반대로 심도가 얕으면 정보성이 떨어져서 소통이 어려워진다. 그뿐 아니라 심도가 깊으면 딱딱하고 객관적인 사진이 되기 쉽고, 심도가 얕으면 부드럽고 감성적인 사진이 되기 쉽다. 결국 기호의 문제이고 조형과 사진심리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성을 강화해서 보다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싶으면 심도를 깊게 하는 것이 유리하고, 특정 사람들, 즉 코드가 통하는 사람하고만 소통하고 싶다면 심도를 얕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바로 이런 요소 때문에 그림이나 사진은 음악적인 요소를 항상 꿈꿔왔다. 어떻게 하면 음악처럼 직접적인 감정 혹은 마음을 곧바로 움직이는 감정의 진폭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이는 모든 시각예술의 공통적인 고민이기도 했다. 회화의 역사는 음의 빛깔을 위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마티에르(붓 터치)를 중시했다. 붓 터치를 음의 감정과 감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떻게 음악과 같은 직접적인 감정의 음색, 음의 빛깔을 내고자 했을까? 그러나 어려움이 크다. 사진은 우선 형상 자체가 사실적이다. 사실(내용)이 보이면 빛깔(감정)이 죽을 수도 있고, 빛깔이 보이면 사실이 죽을 수도 있다. 음악이 상상이고 그림 또한 상상이지만, 사진은 현실이어서 자칫 하나가 살면 하나가 죽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사진은 빛과 색을 강조하면 내용이 약해질 수 있고 내용을 앞세우면 감정이 메마르기 쉽다.

사진의 밝고 어두움을 조절하는 조리개와 셔터의 음계를 음악의 완전음정에 적용시키면 피사체의 적정노출이 바로 완전음정에 속하게 된다. (…) 일반적으로 ‘노출 보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기계적인 개념이며, 음악으로 치면 음계 이동, 즉 음정의 변화이다.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적정노출이 있다. 그런데 왜 노출 보정을 해야만 할까? 이는 음악과 사진이 감정 키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카메라가 적정노출을 지시하는데 플러스 마이너스 노출 보정을 하는 이유는 음악이 완전음정에서 감음과 증음을 시도하는 이유와 같다. 음악이 7음계를 기본으로 하는 것처럼 사진도 적정 노출, -3stop, +3stop 노출이라는 역시 7음계의 노출 보정을 기본으로 삼는다. 우리가 소리를 듣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음의 높이가 아니라 두 음 사이의 관계인 음정의 키 때문이다. 음과 음 사이의 차이의 키로부터 감정이 발생한다. 사진 또한 그렇다.

사진도 음악처럼 밝은 노출이면 경쾌한 느낌이 들고, 어두운 노출이면 우울하게 느껴진다.

기호적 측면으로 돌아가보자. 악보가 지향기호라면 연주는 성질기호이다. (…) 여전히 원본(데이터)이 있고 그것으로부터 이미지가 있다는 점에서 사진도 악보와 연주 체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에서 키의 중요성이 공감의 중요성과 일치한다. 사진도 음악처럼 프린트는 연주처럼 키를 잘 잡아야 한다. 그것이 청중, 즉 관객에게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조형과 사진심리에서 키가 중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음정, 음조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키가 중요한 이유는 이해와 공감, 즉 소통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음정과 음조를 중요시하듯 사진가들도 키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 키의 적절성이다. 그러니까 올바른 키 혹은 제대로 된 키를 어떻게 잡을 수 있는지, 키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인지, 또 어떤 때에 음악처럼 장조의 키, 단조의 키를 선택해야 하는지, 이런 키의 문제가 조형과 사진심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때 일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적정노출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진에 적정노출이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음악에 7음계가 있지만 절대 키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진에도 적정노출을 지시하는 표준 키가 있찌만 참고용으로 생각해야 한다. 기호는 변화무쌍한 것이다.

그림자

그림자는 원형을 대신하는 가상이다. 닮음으로 원본을 대신한다. 그래서 빛보다 그림자가 기호의 모습이다. 기호는 어떤 것을 대체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초콜릿을 건네는 것과 같다.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면 암호가 아니다. (…) 그림자는 누군가의 몸을 대신한 강력한 지표기호이다. 그러나 몸 자체는 아니다. 몸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사진에서의 톤은 그 물리적 성질부터가 매우 다르다. 사진에는 톤을 눌러싼 계조, 농도, 입자, 콘트라스트가 있고, 화면의 밝고 어둠에 따른 하이키, 로우키, 미들키가 있으며, 입자의 거침과 부드러움을 뜻하는 하쉬와 소프트가 있다. 이 같은 물리적 성질은 다른 시각예술과 구분되는 사진만의 독특한 물성적 감각이다. 따라서 사진에서의 톤은 물리적, 화학적, 심리적, 정서적 요소들이 통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톤이 사진의 감정을 결정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렇기 때문에 톤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적 지표기호가 아니라 관객에게 마음과 감정, 정서적 빛깔을 전하는 것이다. 사진의 톤이 심리적 감정을 지배한다. 그뿐 아니라 사진에서 톤은 실질적인 감각태이다. 적절하게 조절되고 안배될 때 최적의 조형미학과 사진심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

콘트라스트

무엇이 우선이든 형색과 내용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둘 다 사진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이다. 사진의 형식이 시각적인 면이라는 내용은 심리적인 면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형식과 내용을 취하는 일이며 사진기호를 분담하는 일이다.

사진은 사진가의 탐색, 관객의 탐색에 의해 이루어진다. 형식과 내용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읽히며 어떻게 해석되고 어떻게 수용되는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것들을 기호 안에서 구성하능 일이야말로 사진 효과의 첫 번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능력이 사진의 능력이고 기호 활용의 능력이다. 사진의 기본 구성은 분할과 대조이다. 분할은 곧 대조로, 대조는 곧 분할로 구획된다.

콘트라스트는 대표적인 분할과 대조의 기호이다. 콘트라스트가 강할수록 기호의 지향과 성질이 분명해진다.

현대사진에서 콘트라스트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복선적이고 은밀해진다. 이제 콘트라스트 문제는 동시대성의 문제가 밀접하게 연동되는 기호적 문제로 이끌어진다.

1970년대 이후 현대사진에서 콘트라스트 문제는 랄프 깁슨의 사진에서 정점을 이룬다. 매우 고차원적인 콘트라스트 기호학이다. 심리적이고 신비롭다. 형식과 내용 모두에 있어 극단적인 대비를 강조하는 지표기호로서 심리적 표현주의 사진이다. (…) 그의 사진은 가장 대표적인, 형식과 내용의 콘트라스트 기호학이다. 사진의 콘트라스 문제가 얼마나 기호적인 문제인지, 그것이 지향과 성질이 형식과 내용에 어떤 영향과 효과를 주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진가이다.

콘트라스트는 기호적 속성이 강하다. 양극단이 대적하는 물리적, 심리적, 표현적 성질이 강하다. 한순간에 이념과 내용의 양극단으로까지 전이된다. 콘트라스트는 중간 지대가 없다. 중간이 없는 대조, 대비의 지표기호이다. 기호적 콘트라스트는 극단적으로 표현될 때 유효한 기호적 방법론이다. 또 이때 강력한 지시체가 되고 표현 효과를 극대화하는 지향과 성질을 얻는다.

디테일

결국 현실에서나 사진에서나 디테일은 ‘수비게 드러나지 않는 중요한 세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눈의 문제이고, 그 다음은 생각의 문제이고, 최종적으로는 파악과 인식의 문제이다. 디테일은 물리적, 심미적, 미학적, 철학적 요소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사실 사진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렌즈와 수많은 필름을 개발하면서 오래도록 염원해온 것이 ‘재현의 디테일’이다. 사진의 재현은 지각의 디테일이었고, 지각의 디테일은 현실과 사살의 디테일이다. 모든 사진의 디테일은 지각과 실재의 디테일이엇다.

사진의 디테일은 변함없이 물리적이고 태생적이고 존재론적이다. 부분이 아닌 사진은 없다. 모든 사진은 세상의 어느 부분을 잘라낸 것이다. 물리적 세부이다. 또 부분을 취했다느 점에서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우연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 여러 이론가들의 사진의 본질을 모호성과 우연성에서 찾았던 것돠 세계의 부분성 때문이다. 사진은 세상의 전체를 끌어온 것이 아니다. 일부분을 잘라낸 모호함과 우연함의 극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테일은 기호적 강박관념이다. 전체의 부분으로서 물리적 측면과, 다보여주지 않는다는 심리적 측면과, 모호하고 우연적이고 은닉한다는 점에서 인식록적 측면의 강박관념이 있다.

사진은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공백의 모습이다. 사진을 보는 것과 사진을 통해 아는 것은 다른 차원의 바라봄이다. 디테일의 차원 때문이다. 본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디테일의 차원이다. 사진에서 무언가를 보고 알아채는 것은 저마다 다른 디테일의 차원이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의 세계이다.

사진의 디테일은 물리적이면서도 발생적인 요소이다. 사진에 무엇이 찍혔는지 바라보는 것과 사진 속의 어떤 것이 ‘날아와 찌르는지’ 알아채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기호적으로 물리적 디테일과 발생적 디테일이 구분되는 이유이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침묵하는 생략법이다. 생략법을 구사하는 언어의 모습이다. 사진은 세계에 존재했던 한때의 침묵의 실존이다. 불가해한, 극단적으로 함축된 비밀스런 모습이다. 그래서 무엇을 찍었는지는 알아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채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의 디테일이야말로 사진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스스로 드러나면서 진면목을 숨기는 사진, 모습을 드러내면서 본질을 감추는 사진, 바라보라고 하면서도 쉬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 디테일의 기호이다. 철학과 기호 안에서 세상의 사물들은 은닉된 부분이다. 가려져 있기 대문에 상상력에 의해 나머지를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은닉은 불안정한 상태이다. 불안정하기 때문에 디테일은 들춰지는 사진의 기호 작용이다. 사진은 필연적으로 은폐와 은닉으로부터 들춰지는 디테일의 문제와 맞닥뜨린다. 결국 디테일도 기호의 문제이고 코드의 문제이다. 다음과 같이 기호적으로 구분 가능하다. 첫째는 발생적 디테일이다. 세상의 부분을 취했기 때문에 사진은 세계의 일부로서 디테일이다. 둘재는 언어적 디테일이다. 보여주기만 할 뿐 말하지 않기 때문에 사진은 언어적 디테일이다. 셋째는 구성적 디테일이다. 프레임을 통해서 수용과 배제가 일어나기 때문에 사진은 구성적 디테일이다.

차원

사진 발명 이후 사진이 평면성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거의 불가능했다. 필름과 약품이 개량되고, 인화지가 향상되고, 표현의 소재 및 표현의 변화는 끊임없이 변해도 평면성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니까 1960년대 초반, 영국의 데이비드 호크니가 포토콜라주를 들고 나올 때까지 사진은 2차원의 평면성에 안주했다.

그러나 사진은 완고하게 2차원 평면을 고집했다. 왜 그토록 완고했을까? 일차적으로는 사진의 독자성, 변별성을 위해서였다. 즉 그림이 그림일 수 있는 이유, 사진이 사진일 수 있는 이유는 각자의 차원을 가질 때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존재 방식, 태생적, 본질적, 존재론적 특성을 버리지 않고 지킬 때 고유한 특성을 잃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지금도 사진과 미술의 차원의 문제는 확고하다. 사진은 필름과 인화지에, 그림은 물감과 캔버스에 각자 존재론적 특성을 가진다.

이후 현대 사진에서는 차원의 문제가 보다 급진적이 되고 다양해진다. 현대미술의 맥락 안에서 차원의 문제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화하거나 타 장르와 크로스오버하게 된다.

방향

이것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기호가 지표기호이다. 방향은 기호학의 기본적인 성질이자 절대적 지시체이다. 가령 ‘잘생긴 남자를 보고 미소를 보인 애인의 속마음은 무엇인가?’라는 기호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자.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잘생긴 남자도, 애인도, 미소도 아니다. 방향이다. 애인의 미소가 잘생긴 남자를 ‘향했다’, ‘지향했다.’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만약 애인의 미소가 전혀 다른 곳을 향했다면 속마음은 몰라도 지표기호 때문에 남자가 고통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물리적인 방향성은 심리적인 방향성과 연계된다. 물리적 지표기호가 조형과 사진심리에 직접 연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에서 지표기호의 ‘방향성’은 매우 중요하다.

사진은 지시 방향이 분명한 사회적 코드이다. 우리는 사진의 방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호적인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다. 첫째, 지표기호로서 사진에 내재한 방향성을 어떻게 인식해왔는가? 둘째, 사진에 내재한 기호적 방향성이 어떻게 사회적, 심미적 코드로서 기능해왔는가? 셋째, 사진의 기호적 방향성이 사진의 의미 생산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이상 세 가지 질문은 기호적 방향성이 조형과 사진심리에 어떤 연계망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색이 기호가 되려면 색 자체로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러니까 색을 통해서 이야기나 뜻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색이 있는 피사체를 찍는 것만으로는 색채기호가 될 수 없다. 색은 감정이고 개념이다. 개념적인 컬러를 통해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만 색채기호가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색이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색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의미(내용)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땐문에 단순히 멋진 색, 아름다운 색만으로는 기호가 되지 못한다. 기호는 무언가를 대신하는 것이다.

오브제

회화에서의 오브제 개념은 대체로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에서 폭넓게 보편화된다. 사진에서도 이때 오브제의 개념을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나름의 용도나 기능을 가진 물체 및 물건이 본래의 용도나 기능을 잃고 미적 표현 혹은 미적 기능에 헌신하는 고형적 대상물’로 수용한다.

사진에서의 오브제 개념은 회화와 달리 특별히 규정되어 있지 않다. 사진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며, 정과 동 모두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셔터를 통해서 정을 동으로, 동을 정으로 바꿀 수 있다. 사진 속 오브제의 모습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여러 가지 점에서 사진의 오브제는 회화의 오브제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사진의 오브제 개념은 어떤 것인가? 일단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성질 및 요소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1. 스틸 라이프
  2. 테이블 탑
  3. 백드랍
  4. 평면성
  5. 상징성

기호의 오브제 개념은 대상성이다. 본래 자신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얼굴로 태어나는 지향과 성질이 기호적 요건이다. 이 기호적 요건을 통해서 천 가지 얼굴로 태어난다.

시퀀스

1936년에 창간된 <라이프>와 <룩>이 대표적인 화보 잡지이다. 이들의 모토는 ‘사진으로 말한다’였다. 즉 사진이 언어라는 뜻이고, 사진이 언어를 대체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때 그래픽 저널리즘이 사진의 언어성을 보여주기 위해 채택한 방식이 여러 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포토 스토리 혹은 포토 에세이였다. 여러 장의 사진을 통해서 언어(기사)처럼 서론, 본론, 결론(기승전결)을 이끌어내고자 한 것이다. 포토 스토리는 그 시대 그래픽 저널리즘의 언어화 방식이었다.

이 같은 시퀀스는 왜 나타나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현대사회와 문화에 있다. 반복, 정형, 규격, 유사의 시퀀스가 현대사회의 한 유형이기 때문이다. 유사와 반복성의 시퀀스는 현대사회의 표준화 프로그램, 즉 짜여진 시스템화된 사회문화의 정형성이다. 비슷한 반복, 나열, 복제, 복사만이 유효하다는 현대사회의 문화와 ‘붕어빵’ 모습을 개념적으로 기호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데 현대미술과 현대사진에 개념이 출현한 것은 시대 환경 때문이지 예술의 문제 때문이 아니다.

사진은 한 장에서 출발한다. 한 장은 음절일 수도 있고 단어일 수도 있고 문장일 수도 있고, 책과 우주일 수도 있다. 차이는 개념이다. 한 컷으로 한 장의 이미지를 찍을 수도 있고, 24컷으로 한 장의 이미지를 찍을 수도 있다. 한 컷과 24컷의 차이는 시퀀스의 존재 여부일 뿐 사진의 내용이나 가치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연속, 반복, 지속은 한 장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시퀀스는 언어화이고 개념화이다.

디렉팅

이제는 카메라가 유희적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누구나 휴대폰 카메라 정도는 소지하고 있으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가 유희적 도구가 되었다. 이는 사진이 진실의 증거, 오로지 사실만을 말한다는 오랫동안 고수해 온 정직한 매체로서의 부담을 떨쳐냈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렇다. 오늘날 사진의 정직성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직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 사진에 진실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사건과 사고의 발생, 어떤 일이 일어났으니 찍혔을 것이라는 정도의 소극적인 실재성만 인정될 뿐이다.

사람들이 사진을 믿지 못하는 것은 카메라를 믿지 못하고 사진 이미지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찍은 사람, 이용하는 사람, 그것이 유통되는 세상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의 조작 가능성과 남바발되는 사진 이미지 생태계 때문이다. 사진은 출현할 때부터 연출되고 조작되었다. 사진의 도구적 기능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결국 사진이 불신받는 것은 사진 자체라기보다는 사회 자체 때문이다.

디렉팅은 연출과 연기, 인위와 작위의 기호학이다. 각본에 따른 지향, 의지, 성질이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의도된 방향성이다. 그러므로 디렉팅의 문제는 진실의 문제도, 사실의 문제도, 실제의 문제도 아니다. 목적과 수단이라는 지향의 문제, 의지의 문제, 성질의 문제이다. 디렉팅은 말 그대로 의지를 내포한 방향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출 혹은 연기로 바꿔 쓸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연출을 놓고 진실의 문제를 따지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디렉팅은 기호 행위의 전 과정이다. 사진가의 디렉팅은 영화감독의 역할이다. 사진가는 시나리오와 연기자 캐스팅, 장소 섭외, 무대 미술 등 모두를 디렉팅한다. 이렇게 해서 한 장의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다. 이를 ‘타블로 사진’이라고 한다.


Add a Comment Track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