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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무엇인가 (20160824)


권력이란 무엇인가, 한병철 지음, 김남시 옮김/문학과지성사

권력이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인과적 관계로 이해되고 있다. 에고가 권력에 근거하여, 타자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특정 행동을 하도록 영향을 미친다. 권력은 에고에게 타자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하는 능력을 준다. 따라서 에고의 권력은 타자의 자유를 제한하며, 타자는 자신에게 낯선 에고의 의지를 참고 견뎌내야 한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이러한 통상적 이해는 권력이 갖는 복합성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권력의 행사는 저항을 분쇄하거나 복종을 강요하려는 시도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이 반드시 강제라는 형태를 띄는 것은 아니다. 권력자에 대립적인 의지가 생겨나 그에 맞서게 된다는 사실은 이미 그 권력이 나약해졌다는 증거나. 자기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권력은 이미 약화된 권력이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가 스스로 권력자가 원하는 행동을 하려고 하고, 권력자의 의지를 마치 자신의 의지처럼, 심지어 미리 알아서 따르려고 하는 것, 이것은 더욱 강력한 권력의 지표다. 이때 권력에 복종하는 자는 권력자의 의지 내용을 안 그래도 자기가 하려던 것이라고 내세우고, 권력자에게 공감하는 "네"를 통해 그것을 수행한다. 그렇게 되면 동일한 행위 내용은 권력의 매개 속에서 다른 형식을 얻는다. 곧 권력자가 하려는 것이 권력에 복종하는 자에 의해 그 자신이 하려는 것으로 긍정되거나 내면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은 형식의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동기를 부여 받느냐 하는 점이다. "내가 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내가 할 것이다"라는 말에는 더 강한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 마음속으로 "아니요"라고 하는 것보다 권력자에 공간하는 "네"가 더 강한 권력에 대한 응답이다.

강제로서의 권력이라는 모델은 권력이 복합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강제로서의 권력은 타자의 의지에 대항해 자신의 결정을 관철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의 매개 수준은 매우 낮다. 여기서 에고와 타자는 서로에 대해 적대적 관계에 놓이며, 에고는 타자의 영혼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에 반해 매개 수준이 높은 권력은 타자가 하려는 행동에 맞서는 권력이 아니라 그 타자로부터 솟아나 작용하는 권력이다. 더 강한 권력은 타자의 미래를 봉쇄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형성해준다. 그러한 권력은 타자의 특정 행동에 맞서려는 대신, 타자의 행동반경에 영향을 주거나 그것을 변화시킴으로써 부정적인 제재 없이도 타자가 자발적으로 에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게 한다. 이를 통해 아무런 폭력 행사 없이 에고는 타자의 영혼 안에 자리를 잡는다.

여기서 원인이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것은 권력을 통해 외적인 것을 특정한 유기체적 과정의 원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유기체적인 과정은 외적 원인들을 내부에서 반복하기만 하지 않는다. 그 과정을 살아있는 존재가 스스로 만들어내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외적인 것에 자립적으로 반응한다.

허약하던 정당이나 국가가 특정한 정치적 관계에 의해 큰 권력을 획득할 수도 있다. 나아가 복합적인 상호의존 관계는 권력의 상호성을 유발한다. 에고가 타자의 협조에 의존하고 있는한, 에고는 타자와 상호의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에고는 타자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를 표명하거나 관철할 수 없다. 타자가 에고의 강제에 대해 협조를 중단하는 것으로 반응할 수 있으며, 이는 에고를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타자는 에고가 자신에게 의존해 있다는 것을 권력 원천으로 여기고 활용할 수도 있다. 나아가 문화적 규범을 솜씨 좋게 이용한다면 단적으로 약한 자도 자신의 무권력을 권력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에고의 권력은 타자가 자발적으로 에고의 의지를 따라는 관계에서 최고에 도달한다. 에고는 타자를 강제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권력이란 모순어법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가 자유로이 에고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적인 권력을 얻으려는 자는 폭력이 아니라 타자의 자유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절대적 권력은 자유와 복종이 서로 완전히 합일되는 순간에야 얻을 수 있다.

명롱을 통해 작용하는 권력, 그리고 자유와 자명성에 기반을 둔 권력은 서로 대립되는 모델이 아니다. 이 둘은 현상에 따른 구별일 뿐이다. 추상적인 차원으로 올라가면 이 두 모델의 공통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권력은 에고로 하여금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일 수 있게 한다. 권력은 자아의 연속성을 창출해낸다. 에고는 타자에게서 자신의 결정을 실현하고, 그를 통해 타자 속에서 자신을 연속시키는 것이다. 권력은 타자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에고가 자기 자신일 수 있게 하는 공간들을 마련해준다. 권력은 권력자가 타자 속에서 자신으로 회귀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연속성을 강제를 통해서 혹은 자유를 활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자유 속에서 복종이 이루어진 경오 에고의 연속성은 매우 안정적이다. 에고가 타자와 함께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제를 통해 얻어진 자아의 연속성은 매개가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부서진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권력은 에고가 타자 속에 자신을 연속시키고,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일 수 있게 한다. 매개가 영점으로 축소되면 권력은 폭력으로 뒤바뀐다. 순수한 폭력은 타자를 극단적 수동성과 부자유의 상태로 몰아간다. 여기서 에고와 타자 사이에는 어떤 내적 연속성도 성립하지 않는다. 수동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권력 행사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폭력과 자유는 권력 단계의 양극점이다. 매개 정도가 증가할수록 더 많은 자유 혹은 자유의 감정이 생성된다.

권력은 연속체의 현상이다. 권력은 권력자에게 더 넓은 자아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이러한 권력의 논리는 권력의 상실이 어째서 절대적인 공간의 상실로 체험되는가를 설명해준다.

권력은 커뮤니케이션 매체이며 커뮤니케이션이 특정한 방향으로 원활히 흘러가게 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는 권력자의 결정을, 곧 그의 행위 선택을 받아들이도록 유도된다. 권력은 "비개연적 성택이 일어날 개연성을 증가시키는" "기회"이다. 권력은 권력자와 권력에 복종하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행위 선택의 편차를 없앰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거나 조정한다. 이를 통해 권력은 "누군가의 행위 선택을 다른 이의 결정에 이전"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 가능성의 불확정적 복잡성을 감소"시킨다. 권력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적 지도가 반드시 억압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억압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권력은 구성적으로 기능한다.

권력은 자유와 대립하지 않는다. 권력을 폭력이나 강제와 구별해주는 것이 바로 자유다. 루만도 권력을 "양쪽 모두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와 연결시킨다. 이에 따르면 강제에 의한 행동에서는 어떤 권력도 생겨나지 않는다. 복종 역시 이미 그 자체로 자유를 전제하고 있다. 복종이란 언제나 하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은 복종의 가능성까지 파괴한다. 폭력은 수동적으로 감내된다. 그에 반해 복종은 폭력에 대한 수동적인 간매보다 더 많은 능동성과 자유를 갖는다. 복종은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서 일어난다. 권력자 또한 자유로워야 한다. 특정한 상황 조건 때문에 특정한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받는 권력자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를 강제하는 그 상황 조건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권력자는 그 상황 조건에 수동적으로 내맡겨져 있는 것이다. 특정한 결정을 선택하고 관철할 수 있으려면 권력자는 자유로워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그는, 자신의 결정이 진정 자신의 선택이라는 환상 속에서, 곧 그 자신의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행동해야 한다.

해고와 같은 부정적 재재 조치로 위협하면서 자신의 결정을 관철시키려는 상급자의 시도는 그의 권력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권력관계는 그 매개 수준이 낮아서 쉽게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급자가 상급자의 결정을 자발적으로 수용한다면 상급자는 더 큰 권력을 얻을 것이다.

권력은 영향력과는 다르다. 영향력은 권력 중립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향력에는 자아 연속체를 구성하는 권력 특유의 지향성이 내재하지 않는다.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결정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급자가 반드시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향력 행사의 가능성이 곧바로 권력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이 권력 관계로 변환되어야 한다.

"권력은 폭력을 가정법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권력은 폭력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 아래 폭력을 사용한다. 폭력은 가상화되고, 부정적인 가능성으로서 안정되는 것이다." 법치국가에는 법질서가 훼손되었을 경우 활성화되는 폭력 사용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법치국가가 폭력이나 다른 부정적 제재 조치에 근거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유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법질서에 대한 인정, 곧 법이 나의 의지이자 자신 스스로 행함이며, 나의 자유라는 생각 때문이다. (...) 부정적 제재 조치를 통해서만 자신의 결정을 관철할 수 있는 자는 별다른 권력을 갖지 못한 자이다. (...) 권력 논리상으로 보면 아무런 부정적 제재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막강한 권력을 가진 조직도 생각할 수 있다.

부재하는 것이 현존하는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갖는 경우도 흔하다. 공간적 권력은 모호한 힘들을 하나로 결집해 전체 질서를 형성하는 중력으로 등장할 수 있다. 이러한 권력의 작용 방식은 선전인 인과성으로는 묘사되지 않는다. 여기서 권력은 권력에 복종하는 자에게 특정한 행위를 유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권력은 특정한 행위가 비로소 자신의 방향을, 다시 말해 의미를 얻게 되는 공간을 열어준다. 따라서 그 공간은 인과성이나 행위 연쇄의 선보다 선행한다. 그 공간은 내부에서 누군가가 더 많은 권력을 갖는, 다시 말해 다른 이보다 우세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권력은 개별적인 권력관계들이 잠재되어 있는 장소를 창출해낸다.

권력은 자양한 형태의 지속성을 형성한다. 권력이 에고로 하여금 타자 속에서 자신을 지속시키고 타자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 했다. 이를 통해 권력은 에고에게 자아의 연속성을 마련해준다. 권력에 대한 욕구는 에고의 이러한 자기 지속성의 감정에서 나온다.

초개인적인 권력체도 다양항 수준의 매개 구조를 가지며, 그에 따라 권력체 전체가 개별자들에게 갖는 태도도 서로 달라진다. 매개가 결핍되어 있는 경우에 전체는 개별자와 위압적으로 관계 맺는다. 이때 권력은 금지나 명령을 활용해야 한다. 전체는 강제를 통해서만 개별자에게 자신을 지속시킬 수 있다. 그에 반해 높은 수준의 매개가 존재할 때는 강제가 없어도 지속성이 형성된다. 개별자 스스로가 전체를 자기 스스로의 규정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전체에 대한 개별자의 관계에 있어서도 개별자에게 강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법치국가에서 법질서는 개별 시민들에게 낯선 강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내린 규정으로 여겨지며, 그것이 시민을 비로소 자유로운 시민으로 만든다. 반대로 전체주의 국가에서 전체는 개별자들에게 낯선 규정으로 체험된다.

강제로서의 권력과 자유로서의 권력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개 정도에 있어서만 서로 구분된다. 그건 한 권력의 서로 다른 현상들이다. 모든 권력 형태는 지속성을 산출하기 위해 존재하며, 하나의 자아를 전제한다. 매개가 결핍되어 있으면 강제를 낳는 반면, 매개 수준이 높으면 권력과 자유가 하나로 수렴된다. 권력이 가장 안정적인 것은 후자의 경우다.

내적으로는 매개 수준이 높은 권력 공간이 외부적으로는, 다시 말해 다른 권력 공간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 이들 사이에서의 매개가 극단적으로 결핍되어 있으면 폭력이 그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다른 국가를 공공연한 갈등 상황으로 몰아가거나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

개별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초국각적 권력체, 초네이션적인 법질서, 다시 말해 네이션 국가적 개별화를 극복할 권력과 법의 지구화가 필수적이라는 것은 권력 논리의 필연적 귀결이다. 그러한 권력에는 네이션 국가를 넘어서는 장소가 주어져 있어야 한다. 오늘날 지구화가 갖는 문제는 그것이 세계 전체를 매개할 정도로 충분히 지구적이지 못한 결과, 심각하게 비대칭적인 구조가 지배적이고, 기회와 원천은 정당하게 분배되지 못하며, 그 어떤 포괄적인 권력과 매개 심급에 의해서도 서로 묶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타자에게 특정 행동을 강요하기 위해 사용되는 물리적 폭력도 비록 폭력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행위와 관련된 결정을 실현시킨다는 점에서는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포함된다.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적 맥락을 결여하면 폭력은 벌거벗겨진다. 이렇게 벌거벗은 상태에서 생겨나는 폭력은 섬뜩함이나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그 어떤 커뮤니케이션적 지향성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타자를 괴롭히거나 무의미하게 죽이는 행위는 바로 이런 벌거벗은, 의미가 상실된, 그래서 포르노그래피적인 폭력이다. (...) 벌거벗은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는 타자가 무엇을 행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는 복종 또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복종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행위인데, 여기서는 타자의 행동, 그의 의지, 나아가 그의 자유와 존엄을 완전히 해소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폭력의 목표는 타자성을 철저하게 제거하는 것이다.

권력은 관계이다. 타자가 없다면 에고에게는 아무런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를 살해하는 것은 이 권력관계를 종결시키는 것이다. 서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 권력도 생겨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물리적 강함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중 한 명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혹은 상대의 물리적 강함을 예견해서 스스로 상대에게 복속할 때 비로소 권력이 생겨난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이끄는 투쟁이 아니라, 그 투쟁의 부재가 비로소 원래적 의미에서의 권력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력적 가능성들이 생겨날 수 있게 하는 실질적인 놀이 공간이 전제되어야 한다. 권력은 아직 죽이지 않음보다 더 큰 시공간을 전제한다. 죽음의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카네티는 권력이 죽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게 하는 것이라는 걸 잊었다. 권력의 부정성에 집착한 나머지 카네티는 권력이 행위와 자유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전혀 다른 의미에서 시간과 공간을 부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할 수 있음 혹은 자유의 시공간이란 결국에는 환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권력은 가상의 형태로라도 그런 시공간을 필요로 한다.

어떤 이해나 행위를 효과적으로 통솔하기 위해서 권력은 일정한 의미 연관에 기대거나 스스로 의미 지평을 만들어내야 한다. 권력은 의미 있음의 빛 속에서 등장할 때에야 비로소 안정석을 얻는다. 바로 이 점에서 권력은 폭력과 구분된다. 폭력은 모든 의미를 결핍하고 있기에 벌거벗은 채로 작동한다. 그와 반대로 벌거벗은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권력과 의미 생성 사이의 복합적 연관성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아주 기초적인 신체적 차원에서조차 권력을 의미에 연관시킨다. 의미는 권력이다.

권력이야말로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권력은 말이 없고 무의미한 강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권력은 달변이다. 권력은 사물들을 명명하고 그것의 '어디로'와 '무엇을 위해'를 규정함으로써 세계를 표명한다.

권력은 사물들이 그에 의거해 해석되는 의미 지평을 만듦으로써 사물이 의미를 갖게 만든다. 사물들은 권력관계 속에서 비로소 중요해지고 의미를 얻는다.

다음엔 라이히가 그렇게 정의했다. 그를 통해 "억압하는 기관"이라는 용어가 오늘날 권력에 대한 거의 자동적인 명칭이 되었다." 억압이란 특정한, 곧 매개가 부족하거나 없는 권력이 한 형태에 불과하다. 권력은 억압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푸코의 권력 일원론이 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인간,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인간은 그 자체로 이미 뿌리 깊은 복종의 결과물이다. 인간에게 내재하면서 그를 존속하게 하는 '영혼'은 그 자체로 이미 인간의 신체에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의 한 조각이다. 영혼이란 정치적 해부학의 효과이자 도구이다." 푸코는 권력을 금지나 강제라는 좁은 틀에서는 벗겨냈지만, 그의 권력 일원론은 사회적인 것을 전달해버렷따. 사회적 의미를 산출하는 것은 권력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은 섹슈얼리티를 무조건 침묵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은 "담론적 과민성"을 발전시킨다. 권력은 신체를 말하게 한다. 날카로운 질문들이 새로운 쾌락 감각을 일깨워내면, 통제하는 시선들이 그것을 고착시키면서 증강시킨다. 말하자면 "섹슈얼리티의 경향성"은 금지의 법칙이 아니라 "자극과 증식의 매커니즘"인 것이다. 권력은 쾌락의 감소가 아니라 쾌락의 증가로 우리를 이끈다. 감시 관계는 살갗을 자극하는 유도 접촉으로 모습을 바꾼다. 권력은 끊임없이 떠들고 말하는 성적인 신체를 형성한다.

쾌락은 권력에 추격당하면서 바로 그 권력의 주변에 흩뿌려진다. 권력은 자신이 몰아대는 쾌락을 정박시킨다.

쿠포는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의 세 가지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 하는데, 이는 그 의미론적 작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서술 될 수 있다. 그가 첫번째로 다루는 것은 주권자적 권력이다. 이 권력은 칼의 권력으로 위에서 아래로 빛을 비추듯 작동한다. 이 권력은 육중한 방식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복수나 투쟁, 승리라는 형태를 띈다. 범죄자는 싸워 이겨야만 하는 적이다. 주권자적 권력의 언어가 "피의 상징"으로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권력은 분화와 매개 수준이 낮다. (...) "이 권력은 상징적 기능을 가진 실재인 피를 통해 이야기 한다." 피는 의미를 발한다. 고문당한 신체도 기호처럼 작용한다. 그 신체는 "표지"이다. 그것은 의미를 갖는 경고 표지이다. (...)

권력의 두번째 테크놀로지인 시민적 법률의 권력은 자신의 고유한 기호 체계를 사용한다. (...) 이 권력은 기호와 표상을 순환시킴으로써 작용한다. 여기에는 칼이 아니라 법을 만들어내는 펜이 동원된다. 이를 통해 권력은 강제적 폭력이 아니라 '강제적인 확실성'으로 등장한다. 이 권력은 테러가 아니라 이성을 통해 작용하려 한다. 펜은 권력을 칼보다 더 안정적인 토대 위에 세운다. (...) 이 권력은 도덕적 표상이나 법에 대한 존중을 통해 조용하게 효과를 발휘한다. 정신은 날것인 폭력이 아니라 매개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 권력은 한 사회의 관통하고 있는 생각과 표상 들의 연속체를 형성함으로써 연속적으로 작용한다. 정신의 권력은 법의 권력이다. 이 법은 "기표 체계"로 유통되어 "모든 것을 말하고, 설명하며, 스스로 정당화하고 확신시키는, 가시적이며 말이 많은 처벌"을 통해 계속 갱신된다.

권력의 세번째 테크놀로지인 규율권력은 상처나 표상보다 더 깊숙하게 주체 속으로 파고들어 간다. 이 권력은 신체 내부로 들어가 거기에 "흔적"을 남기며, 그를 통해 습관의 자동 주의를 만들어낸다. 규율권력은 법전의 권력처럼 은밀하고도 미세하게 작용하면서도 표상이라는 우회로를 거치지 않기에 더 직접적이다. 규율권력은 반성이 아니라 반응을 통해 작동한다. 법적 주체를 재생하는 일보다 "순종적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추구되었다. "철저한 시간 계획, 습관의 전유, 신체의 속박을 통해 특정한 태도를 훈련"시킴으로써, "시간, 공간 그리고 움직임을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코드와하는" "집약적 교정학"이 시도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습관의 자동주의가 자리 잡게 되면 권력은 "더 이상 이전의 수고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고 푸코를 말한다. 그렇기에 이 권력은 일상성의 모습을 띄고 있다.

이 규율권력은 차별화된 언어를 지닌다. 규율권력은 상처를 입히는 대신 살과 피과 되려고 한다. 규율권력은 칼이 아니라 규범 혹은 규범성을 통해 작동한다. (...) 아예 형태를 부여하는 이 권력 작용 앞에서, 신체를 권력관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권력 비판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규율권력에는 강제들이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로부터 생산적인 작용 또한 생겨나기 때문이다.

푸코는 기술-정치적 장에서 형성되고 활용되는 신체와 해부학적, 형이상학적 장에서 분석되는 라메트리의 인간-기계 사이에는 비밀스러운 상응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분석 가능한 신체를 조작 가능한 신체와 접합시키는 연결고리는 "고분고분함'에 관한 믿음이다. 규율권력은 복종하고, 말을 잘 듣고, 고분고분한 신체를 생산해낼 뿐만 아니라, 담론 또한 생산해낸다.

아비투스는 한 사회 집단의 경향이나 관습을 지칭한다. 그것은 특정한 지배 질서를 관철시키는데 기여하는 가치나 지각 형태를 내면화함으로써 생겨난다. 반성 이전에 작동하면서 신체적으로 작용하는 아비투스는 현존하는 지배 질서로의 편입을 가능하게 하는 습관의 자동주의를 산출해낸다. (...) 이러한 점에서 아비투스는 신체적인 것에서도 작동하는 지배 질서를, 의식하기도 전에 긍정하고 승인하게 해준다. 우리가 사회적 위치 때문에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도 이것이다. 해먄한 하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취향이라고 양식화된다." 이를 통해 희생자들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운명에 스스로를 봉헌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아모르 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 운명이 자유로운 선택인 양 체험되는 것이다. 피지배자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인 자신의 상태를 자기 취향으로 삼게 된다. 빈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 되고, 강제나 억압이 자유로 여겨지는 것이다.

사회적 의미는 언제나 어떤 권력과 지배의 차원을 함축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다양한 권려고간꼐가 표현되어 있다. 사회적 의미는 상징적으로 작동하는 권력의 침전물인 것이다. 권력은 결코 벌거 벗고 있지 않다.오히려 권력은 달변이다. 권력은 특정한 지배질서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관점이나 해석의 전범을 산출함으로써 작동된다. 그러한 관점이나 해석 전범들은 신체적 차원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의미는 "자연이 되어버린, 즉 운동적 도식과 자동적 신체 반응이 되어버린 사회적 필연성"을 통해 행위들이 "의미를 갖도록, 다시 말해 일상적 이해로 무장하도록" 만든다. 이 이해는 마치 습관적 반사 운동처럼 직접적으로 일어나기에 그 의미 자체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행위자들이 자신이 행하는 것의 의미를 결코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그들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권력은 아비투스에만 기입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 권력은 파편화를 싫어한다. 동질적이고 민족국가적인 의미 형성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중의 충성과 그것을 통한 지배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공공 해석"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평균적 이해", 곧 일반적인 세계관을 규정하는 일반적인 지각을 말한다. 그것이 "모든 가치와 현존재 해명을 지배하고 그 모든 것에서 옳다고 주장한다." (...) 이러한 "평균적 이해"의 주체가 바로 "세인"이다. 세인들은 자기가 보고 행동하고 판단하는 대로, 보고 행동하고 판단한다. "특정한 사람이 아닌, 총합이 아니지만 모든 것인 이 세인들이 일상성의 존재 방식을 규정한다."

"공공 해석"을 방향을 부여하는 세계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것은 현존재가 늘 스스로 세계를 해석하거나 새롭게 고안해내지 않아도 되도록 현존재의 '짐을 덜어준다.' 이미 해석된 세계, 더 이상 캐물을 수 없는 그러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존재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세인들의 "독재"는 억압이나 금지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습관의 형태를 띈다. 그것은 자명성의 독재이다. 습관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은 명령을 내리거나 강제를 행하는 권력보다 더 효과적이며 안정적이다. 그러한 권력의 효력은 우리 자신이 세인에 속한다는 내재성에 근거하고 있다. 모두가 세인이기 때문에 세인은 '우리'에게 강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일상적 현존재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지는 세인은 아무도 아닌 자이다. 모든 현존재는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을 아무도 아닌 자에게 내맡겨버렸다." 이러한 권력은 그 누구의 권력도 아닌 것으로 지각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누군가의 소유가 지각되지 않기에 결코 훼손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금지, 억압 혹은 배제라는 형태로 자신을 강제해야 하는 권력은 불안하며 "깨지기 쉬울" 것이다.

권력은 "세인"으로 등장할 때, 즉 자신을 "일상성"에 기입할 때 높은 안정성을 얻는다. 강제가 아니라 습관의 자동주의가 권력의 효과를 상승시킨다. 절대적 권력이란 모습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지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명성과 완전하게 합치되어 있는 권력일 것이다. 권력은 부재를 통해 빛을 발한다.

니체는 이렇게 쓴다. "권력의 쾌락은 우리가 수백 번이나 경험했던 의존성과 무력에 대한 불쾌감을 통해 설명된다. 이 경험이 없다면 쾌락도 없다." (...) 권력을 얻었을 때 생기는 쾌락의 감정은 자유의 감정이다. 무력은 타자에게 내맡겨졌다는 것이며, 타자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권력이란 그와 반대로 타자에게서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유롭다는 것이다. (...) 오히려 쾌락은 권력돠 더불어 자라나는 자아의 연속성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권력에 복종하는 자는 권력자가 의욕하는 것을 행하며, 여기서 권력은 자아의 연속성을 산출해 낸다. 하지만 이때 생겨나는 것은 외적인 연속성이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가 권력자의 의지에 내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채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아의 연속성이 권력자에게 자유의 감정을 주는 것은, 그의 의지가 타자의 의지에 맞서 꺽이지 않는 한에서일 뿐이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는, 물론 외적이긴 하지만 권력자를 위해 자신의 타자성을 포기한다. 그는 권력자와는 다른 선택을 하려는 의지에 반해 권력자의 선택 또는 결정을 따른다. 이를 통해 권력자는 타자에게서 자신의 의지를 본다. 타자에게서 자아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권력 감정의 핵심이다.

타자는 자유롭게 에고의 의지를 따르고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삼는다. 이를 통해 타자 역시 자유의 감정을 얻게 된다. 이러한 권력관계는 권력에 복종하는 자가 수동적이고 질료적인 물질처럼 행동하는, 매개가 부족한 권력에서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권력이란 타자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권력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다. (...) "생명체는 비유기적 자연에 맞서 있다. 생명체는 비유기적 자연에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면, 그것을 자신에게 통합시킨다. (...) 오히려 생명체는 자신의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타자들을 장악하고 있다. (...) 이렇게 해서 생명체는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

정신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유이다. "따라서 내면성의 마지막 정점은 사유이다. 사유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그럴 경우 그는 타자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자, 외부에 연루되어 있는 한, 즉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지 않는 한, 타자의 타자성을 자아 속에서 지양하지 않는 한 자유롭지 못하다. 사유하는 정신은 타자를 꿰뚫어 관통하고, 타자를 철저히 밝혀냄으로써 타자의 타자성을 제거한다. 그를 통해 정신은 자아의 연속성을 관철해낸다.

주관성은 권력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비유기적 존재는 중심화된 구조를 가질 수는 있어도 아무런 권력 구조도 발전시키지 못한다. 그 존재를 살아 있게 할 주관성이 없고, 내면성 또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 공간은 자기중심적이다. 그 공간에는 자기 욕망의 지향성을 가진 자아가 자리 잡고 있다. (...) "모든 권력 구조는 중아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 구조는 모든 부분이 향하고 있고, 관계 맺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

권력은 환경 세계가 만들어낸 부정적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유기체가 자기 자신으로 머무를 수 있게 함으로써 자아의 연속성을 산출해낸다.

권력이란 여러 방식으로 타자에 연루되어 있어도 자신을 상실하지 않는, 부정적 긴장감을 관통하여 자신을 연속시킬 수 있는 생명체의 능력이다. 그것은 "내외적 부정에 저항하여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주장을 반드시 타자의 억압이나 부정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매개 구조다. 매개 수준이 높을 경우 자기 주장은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통합한다. '신'은 최고 매개 능력을 지닌 존재다. 그에 반해 폭력범은 신경증 환자와 같다. 그는 매개가 없는 폭력을 통해서만 자아의 연속성을 얻을 수 있다. 신경증적 자기긍정은 타자의 부정을 초래할 것이다.

헤겔에게서 "이성"은 객체가 폭력적으로 복종해야 할 단순한 주관적 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성은 객체 자체에 현존하며 거기서 작동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주체는 사유 속에서 자신과 객체에 공통되는 것, 곧, 보편자를 등장시킨다.  이러한 매개 관계가 권력 구조를 변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은 객체 속에서 자신에게 회귀하기 위해 객체를 전유하는 개별 주체에 귀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은 스스로를 현시하는 보편자의 권력이며, 그 보편자가 개별 존재자들, 다시 말해 '주체'뿐 아니라 '객체'까지 하나의 전체로 모아내는 것이다.

헤겔은 '개념'도 권력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이 개념의 권력이다. 개념은 흩어진 객관성 속에서 자신의 일반성을 포기하거나 상실하지 않고, 오히려 이 실재성을 통해, 그리고 그 실재성 속에서 자신의 통일성을 보여준다. 타자 속에서 자신의 통일성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개념이기 때문이다." 개념은 서로 다른 실재성의 현상에 공통된 것을 포괄하면서 포착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개념은 다양한 모든 현상을 모으고 매개하고 관통해 하나의 전체성을 형성한다.

개념의 권력은 매개 수준이 높다. 그것은 개념의 타자인 실재가 개념에 의해 억압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념은 실재에 내재한다. 개념은 실재에 대립하면서가 아니라 실재 속에서 자신을 현시한다. 개념의 권력에는 폭력이 없다. 헤겔이라면 폭력에는 개념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더 많은 개념을 자신 안에 수용하는 권력일수록 더 적은 강제와 폭력을 낳을 것이다. 실재는 그 개념에 대해 투명하다. 개념은 실재를 밝히고, 실재가 비로소 존재하게 한다. 개념의 빛이 실재를 가리지 않는 것은 그 빛이 실재의 빛이기 대문이다. 개념과 실재가 서로 밝게 침투되어 있는 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보편자는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그것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관계 맺으며, 그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회귀한다." 타자를 장악할 때 보편자는 타자의 "아니오"에 맞서지 않는다. 타자는 장악하는 자를 자신의 진리로 긍정한다. 타자는 자신을 장악하는 자에게 자유롭게 복종한다. 장악하는 자가 타자 속에서 "고요히 자기 자신으로 있는" 이유는 이 타자로부터 아무 저항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읻.ㅏ 타자는 장악하는 자에게 "네"라고 말한다. 장악하는 자에게 붙잡혀 그에게 자신을 열어 보인다. 그렇게 절대적 권력은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유로운 복종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에서 주권자 혹은 국가의 "스스로를 확신하는 주관성"이, 다시 말해 "최종 결정권을 가진 의지의 절대적 자기규정"이 표명되고 있는 것이다. 주권자는 자신의 이름, 그리고 "나는 원한다"를 반복함으로써 작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름이다. 그것은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정점"이며, "스스로를 규정하는 완전한 주권자적 의지, 최종적인 자기결정"이다. "나는 원한다." "나는 나를 원한다."

주권자의 의지는 예외상황뿐 아니라 정상상황에서도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예외상황에서의 "아니요"가 끊임없이 발화되고 있는 "네"보다 더 긴박한 것일지는 몰라도 이 "네" 역시 "아니요"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향한 의지, 권력 공간으로서 국가를 구성하는 주관성을 향한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신학적 주권자의 경우와 달리 정치적 주권자의 권력은 상대적이다. (...)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개인은 주어진 조건과 수단을 통해서만 의지를 형성할 수 있다. 절대적 제후조차 정보와 소식에 의존하며 조언자들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하다. (...) 이로 인해 모든 직접적 권력은 간접적 영향력에 복속되어 있는 것이다."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려면 반드시 권력 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상적인 경우 권력기구는 "간접적 영향력의 영향권"과는 거리가 멀다. 나아가 어떤 정점 또는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일이 없는 의회민주주의에서는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는 "권력자의 영혼으로 향하는 복도"는 생겨나지 않는다. 이전 시대 권력의 전실은 오늘날에는 그와 다른 모습을 띈 권력의 전실들로 대체되었다. 로비라고 불리는 권력의 응접실이 그것이다.

권력이 인간의 의지에서 벗어나고 인간이 더 이상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더 이상 주권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결단"이라고 말하면서 슈미트가 인간을 불러내는 데 열중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비스마르크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도달한 오늘날의 미디어들은 정치적 정보학을 근본적으로 변환시킨다. 미디어들은 정보 장벽을 쉽게 극복하낟. 그래서 권력 공간을 공공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는 권력 전실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현대의 정보기술은 그런 종류의 권력 전실을 손쉽게 뚫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간접적 영향력의 영향권을 형성한다. 미디어에는 명확한 지향적 구조가 결여되어있다. 미디어의 공간은 너무 모호하고, 지나치게 분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미디어는 어떤 특정 행위자나 특정 기구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 미디어에 내재하는 특성인 구조적 분산과 탈집중화는 한 곳으로의 뚜렷한 귀속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향해 있지 않은 인터넷 공간은 그 때문에 우연성을 극단적으로 증가시킨다. 나아가 권력과 영향력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아무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 구조가 언제나 영향력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향력은 연속체를 형성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영향력은 점적으로도 일어날 수 있지만 권력은 공간의 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 정점이 권력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담지하고 긍정하며 정당화하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권력은 정점에 집중되어 있다 하더라고 공간의 사건, 함께함 또는 전체성의 사건이다. 개별화와 고립은 권력에 유해하다. 반대로 그것들은 폭력과 함께할 수는 있다. 폭력은 점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폭력이 권력을 생겨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이 폭력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은 스스로 공간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혁명 상황에서는 폭력이 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에만 의존하고 어떤 권력에도 의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권력이 없으면, 즉 타자의 동의가 없으면 폭력은 좌초할 수박에 없다. 그와 달리 권력을 가진 폭력은 새로운 공간을 이끌어낸다.

"하나가 모두와 대립하는 관계에서 폭력의 극단적 형태가 생겨난다." "하나가 모두와 대립한다"는 폭력의 극단적 형태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게 이해 된다. 폭력은 고독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타자들의 동의에 의거하지 못한다.

지배자의 전략과 조직 앞에서 노예들의 '견해'만으로는 어떠한 권력도 생겨나지 못한다. 노예들은 스스로를 조직하지도, 전략을 발전시키지도 못햇다. 노예주들의 권력은 그 집단의 우월성이며, 그것은 '우월한 조직', 다시 말해 효과적 전략 덕택이다.

이보다 소통이 이미 늘 전략적이라는 생각이 현실적이다. 그러한 생각에 의하면 전략적 행위는 '폭력'의 원천이 아니라 권력의 구성적 계기이다. 권력은 결코 순수하게 소통적이거나, 순수하게 상호이해 지향적일 수 없다.

비대칭적 관계는 폭력이 아니라 매개가 결핍된 권력 형태에서 나온다. 폭력이란 매개가 제로 상태까지 축소된 특수한 권력 관계를 지칭할 뿐이다. 이러한 매개의 결핍으로 인해 폭력은 소통 참여자들에게서 자유의 감정을 앗아간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들의 권력자의 지배를 완전히 승인하는 권력관계는, 그 관계 자체가 강한 비대칭을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폭력관계가 아닌 것이다.

폭력과는 달리 권력은 자유의 감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은 자신의 안정화를 위해 의식적으로 자유의 감정을 산출해낸다.

"영토 점유"는 "법을 구성하는 근원적 형태"이다. 그것이 "공간에 최초의 질서를 세우고, 그로부터 기인하는 모든 구체적인 질서와 법의 근원"을 세우려는 것이다. 영토 점유를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법적 공간이 열리며 대지는 하나의 장소가 된다.

장소는 "자기 자신에게 결집"시키고 "자기 자신에게 모인다." 모든 힘이 끄트머리를 향해 모이며, 하나의 연속체를 이룬다. 장소의 근본 특성은 자기 자신으로 나아감이다. 모든 것을 자기에게 모으고 결집시키는 장소는 자기중심적 연속체를 이룬다.

세게화는 권력과 영토의 관련성을 느슨하게 했다. "유사국가"와 같은 초국가적 권력 구조는 특정 영토에 묶여 있지 않다. 그것은 육지적이지 않다. 권력을 형성하거나 확장하기 위해 고전적 의미에서의 "영토 점유"가 필수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화가 장소화의 논리를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다.

권력은 장소가 없는 아무 곳도 아니 곳에서는 생겨날 수 없다. 세계화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탈영토화의 움직임이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화는 다야앟ㄴ 재장소화의 형태들 또한 만들어내고 있다.

시장 역시 경제적 영토 점유를 통해 점거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공간을 둘러싸고 싸움을 벌이듯, 시장 지분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진다. 세계화된 시장은 더 이상 육지에 구속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장소화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여기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 자신의 장소를 확정해야 한다.

권력의 윤리화는 장소가 자신의 자기중심적 추구를 넘어서 나아가기를, 장소가 일자뿐 아닌 다수와 그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도 체류 공간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근본적인 친절함에 자극받아서 그 공간이 자신을 향한 의지를 멈추로 울려 퍼지기를 요구한다. (...) 권력 그 자체에는 타자성에 대한 개방이 없다. 권력은 자기를 반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장소가 끄트머리를 향해 나아가듯 자본도 자신을 반복하고 확장하려는 충돌이 내재한다.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행사된다. 주체들이 자유로워야만 권력관계가 존속한다.

권력은 생명의 일반 원리이다. 단세포조차 권력을 추구한다.

정의로운 자는 자기 자신보다 사물에 더 귀를 기울인다. 확신에 거리를 두는 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거리를 두는 것이다. (...) 정의를 오는 자는 늘 빨리 오는 자신의 판단을 오류하낟.

친절함은 권력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다. 권력이 자신에게 가능한 정도를 넘어서까지 매개하려면, 권력은 자기 자신이 아닌 것에 의해 촉발되어야 한다. (...) 하지만 친절함에는 권력이 지향성이 결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주관성이 "정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친절한 장소는 다음과 같이 권력의 장소와 구분된다. 친절한 장소는 개별자 또는 부차적인 것을 오로지 자신의 연속성만을 위해 지각하는 대신, 그들의 본질속에서 드러나게 한다.

권력이 자신의 "넘쳐흐름" 속에서 무조건적인 "환대"로 드러나는 것에서도, 권력은 자신의 타자와 경계를 긋는다. 그렇게 되면 권력은 자신 속에 자기 지양을 함축한는 일종의 초권력이 된다. 그로부터 자신으로의 회귀, 자기 의욕에 의해 재 전유될 수 없이 일어나는 그 베풂이 나온다. 어떠한 의식이나 의도도 없이 일어나는 그 베풂이 타자를 위한 행위보다 먼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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